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텍스트 레터 13

어느 하루, 그 순수성

by 진하 Mar 20. 2025


나날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문득 하루의 노고는 그날로 충분하다는 말을 떠올리고, 그대로 하루의 노고라고 써두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각별히 보고하고 싶은 것도 없다. 무대가 없는 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스꽝스럽다.
(……)
완성과 질서를 동경했다. 그리하여 예술은 말라버렸다.
(……)
낭만적 완성 혹은 낭만적 질서라는 개념은, 우리를 구원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을 꼼꼼히 정리하여 하나하나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해가 저물어 버렸다.
(……)
옛날, 고사기(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역사서) 시대에는, 작가는 모두 작가이면서 동시에 작중인물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꺼림칙함도 없었다. 일기는 그대로 소설이고, 평론이며, 시였다.
로망의 홍수 속에서 자란 우리는 그저 그대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하루의 노고는 그대로 하루의 수확이다.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한다.
(……)
생활이 작품이다. 횡설수설한다. 내가 쓰는 것이 어떤 형식이든, 그것은 틀림없이 내 전 존재에 정직한 것이리라.

다자이 오사무 『나의 소소한 일상』

'하루'라는 언어로 시작하는 글이나 '하루'라는 한정된 시점으로 다루어내는 장면이나 어느 누구의 어떤 '하루'이든, 나는 그 '하루'에 대해 상상하고 고심하고 애정한다. 내게 '하루'는 '생'의 감각이자 가장 근접한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오려낸 듯 제시한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은 하물며 제목이 '하루의 노고'이다. 순간 내 마음속의 생각에 밝은 빛이 탁 켜지며 그가 하는 이야기에 몰입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글은 시적이고 짧은 단상 같기도 하며 분절된 의식의 흐름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니 나는 그 분절된 의미들을 내 멋대로 해석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사명을 품은 고독한 작가에게 모두와 똑같은 하루가 주어지고, 그도 줄곧 그 하루에 대해, 생에 대해, 그로부터 빚어질 작품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이었기에, 그는 '하루'를 곧 '생활'이자 '작품'으로 바라본다.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경멸했을까? 특별한 호기심과 지적인 결과물을 생산해 내야 하는 자신―스스로 의식하는 자신―과, 그 앞에 채워야 할 시공―하루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생의 시간과 공간―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을까. 아마 '하루'를 통해 완성과 질서를 갖춘 완전한 무언가를 창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하루는 그의 삶이기도 하고 곧 그의 분신인 작품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무언가를 창출해내고 싶은 욕구와 지리멸렬하고 보잘것없는 현태 사이에서 서성인 것은 아니었나. 그럼에도 결국 그가 맺는말은, 그대로, 그대로, 살아낸 형태 그대로의 '하루'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 아닌가. 아, 물론 나만의 뜻으로 그의 글을 그렇게 읽었을 뿐이다. '하루의 노고는 그대로 하루의 수확이다.' 나는 '하루의 노고'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하루=생,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하루'에 관한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인데, 공공화장실 청소를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이 내게는 30여분 같았다. 나는 흥미로워하며 그의 하루를 질리지도 않고 따라갔다. 보통은 영화를 보더라도 '대사'를 남기는 편인 내게, 이 영화는 색다른 기억으로 남았다. 대사 없이, 상황에 대한 별다른 언어적 설명 없이, 깊이깊이 주인공인 그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주인공의 표정과 행위와 그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는 경험은 드물다. 이른 아침 문을 나설 때 그의 표정. 차에 올라 늘 똑같은 자판기 커피 캔을 한 모금 마시며 출발하는 시작. 아침마다 작은 잎을 틔우며 크고 있는 화분에 물을 분무하는 그의 행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과 햇살을 고개 들어 바라보는 그의 시선. 이부자리 곁의 독서등과 작게 등을 내보이며 펼쳐진 문고판 소설책.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는 공공화장실 청소 장면. 등등. 그는 자신의 하루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지만 나는 그의 하루가 그 자체로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충만하구나.' 그에게 '하루'란, 있는 그대로 충분한 삶이구나. 그의 하루에서 감명받은 부분을 떠올려보니, 같이 일하는 동료와의 장면이었지 싶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동료의 물음. '직접 청소 도구까지 만들어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던 작업을 계속해나갔을 뿐이지만 그 순간 내 온몸에 전율이 일만큼 그 하루의 주인공을 똑바로 응시하고 느낄 수 있었다. '하루'라는 건, 딱 하루치가 쌓여 만들어지는 생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이토록 견고한 거였구나. 글쎄, 눈물이 차오를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웠던 '하루의 삶'이 내 부족한 표현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사실 이게 고통스럽긴 하죠. 내 앞에 놓인 하루. 이건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모래밭입니다. 그래도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어 마십니다. 주전자, 잔, 잔받침은 잔이 닦아줍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은 어쨌든 행복한 순간이죠. 보세요, 나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순간은 빨리 지나가지요. 이 순간을 천착하고 연장시킬 길을 찾아야겠지요. 가끔 날아갈 듯 가볍고 즐거운 순간도 있지만, 그것 역시 금방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뭔가 솟아오르고 분출된다면 거기엔 마르지 않는 원천, 샘이 있겠지요. 가슴속 파라다이스의 광명, 태양이 능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눈 덮인 산으로 둘러싸인 신선한 호수가 있는지도 모르죠. 어딘가 이런 것이 존재할 겁니다. 한때 이렇게 생각하고 조금은 기대했으나 점차 믿지 않게 되었고, 이젠 전혀 믿지 않아요. 깊이 침잠할수록 오직 수렁, 더러운 늪뿐입니다. 내 말에 모순이 있지요. 맞아, 모순이지요. 이것 또한 내면에 어떤 갈등, 그럴듯한 충동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항상 짓눌려 있고 기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세계가 언제나 불변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요, 이 점이 나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지요.

외젠 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

나의 하루는 어떤가? 그 자체로 온전하지도, 간결한 완성의 아름다움을 지니지도, 영원히 반복되는 불변의 순수성으로 활기찬 기대를 늘 새로이 선사하지도 않는다. 나처럼 때때로 자신의 하루와 자잘한 갈등을 일으키는 이들은, '하루'에 너무 많은 욕구와 판단을 심는다. 이것은 이러해서 하고 싶지 않고, 이렇게 하면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오늘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고, 주어진 이 순간이 부당한 것 같고, 끝내 나의 하루가 엉망이 된 듯 괴로워하기까지. 잊지 말아야지. 하루=생, 이것을. '하루'를 계속해 움트는 원초적인 생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숨 쉬듯 도래하는 새로운 하루는 그러한 '불변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모두, 그렇게 기대하고 믿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모든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가요?

알다시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합니다. 때론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출석만 하면 A학점을 받는 수업처럼 말이죠. 하지만 목적이 분명할 때 인생에 활력과 동력이 생깁니다.

김지수 인터뷰집 『위대한 대화』- 심리학 교수 폴 블룸과의 인터뷰 중

'하루'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출석만 하면 A학점을 받는 수업처럼 말이다. 가볍고 충실한 마음으로 나의 생에 출석체크를 하는 거다. 오늘도, 내일도, 새롭게 기꺼이. 이것이 어느 하루가 지닌 순수성을 체득하는 좋은 방법이 되어 주지 않을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 원하지 않아도 나의 하루는 반복해 샘솟는다.

작가의 이전글 텍스트 레터 12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