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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오름 Oct 27. 2024

다시 걸음마

그래 늦지 않았어. 이제 시작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상당히 늦은 나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내면의 언어들을 밖으로 제대로 다 내놓기 위해서 그전에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결정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도 그렇고 동료들을 보아도 그렇지요. 처음에 우리 모두는 다른 것을 했습니다. 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생의 두 번째 장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가 스물두어 살 때 쓴 성공적인 작품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그들 중에 두 번째 책을 성공시킨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레이 먼드 챈들러나 로버트 러들럼 같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마흔이 되어서야 글을 썼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성공적인 작가들은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다른 일을 하면서 반평생을 살았습니다.”


위 내용은 톰 버틀러 보던의 저서 피크타임에 삽입되어 있는 짐 그랜트(필명 리 차일드)의 일화다.


“제가 아는 모든 성공적인 작가들은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다른 일을 하면서 반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말에 나는 올해 초 엄청난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 물론 임상 탈출을 계획하고 시도했던 그 당시에 이 책을 읽었던 건 아니다. 2024년의 시작, ‘진짜 나’를 찾겠다며 퇴사 후 집에만 있다가 일평생 해본 적 없던 이집트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 시간이 꽤 흘러 봄이 부쩍 다가온 때였다. 평소 자주 가던 서점에서 여러 책을 구경하다가 마침 눈에 띄어 손이 갔던 책이다. 화려한 책표지에 마음이 이끌렸고 그다음에는 제목에 이끌려 펼쳐본 책 속에서 나는 “이거다.” 확신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이 <피크타임> 책은 몇 년 전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 당시 한국사를 강의하셨던 전한길 강사님의 추천사가 적혀있었다. 바로 책을 집어 들어 구매 후 집 안으로 들여왔다.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하기에 늦은 것은 없다.

또한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 쓸데없는 것 역시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경험은 자산이다.

나의 좌우명과 같은 말이다. 내가 먼저 손을 놓지 않으면 절대로 실패란 없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성공으로 가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 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마침내 병원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제 나는 간호사가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실감했다. 이전까지는 병원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갇혀 임상 간호사로 연차를 먹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삶도 나쁜 삶은 아니겠지만 나에게 행복한 삶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다니는 병원이 아니라 임상 그 자체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건 오래전이었다. 나는 신규 간호사 시절을 거치면서 대략 스물다섯과 여섯의 경계 그 어느 시점부터 나름대로 절대 타인에게 잡히지 않을 임상 탈출 계획을 세웠다. 영화 쇼생크탈출을 그 당시 보았더라면 내 계획이 조금 더 치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치밀한 계획도 없었고 원대한 목표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조건 나는 이 병원을 나갈 거고 임상을 탈출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살았다. 출퇴근시 뿐만 아니라 정신없이 업무에 치여살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늘 저 말을 가슴에 새기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 한 장씩을 품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이 가슴속에 품은 종이 쪼가리를 꺼내 책상 위로 올려두는 상상을 하는 직장인. 오랫동안 준비한 가슴속 사직서를 하늘 위로 멋지게 흩뿌리는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하루살이와도 같은 삶. 그게 바로 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의 임상 탈출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고 원대한 목표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실패에 그쳤다. 사실 원대한 목표까지도 아니었다. 정확한 목표는커녕 그냥 목표 자체가 없었다. 유일한 목표라면 그냥 병원을 나가는 것과 간호사를 하지 않는 것, 내가 간호사로서 병원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1순위 목표였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목표도 없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채 현실에 치이며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 다니는 것에 불과한 임상 탈출만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


조금 더 용기가 생겼을 때는 스물여섯 쯤이었다. 임상 간호사로 도저히 내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간호직 공무원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선포했다. 이후 대략 6개월가량 수험생활을 보냈다.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에게는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꿈이라는 이상을 찾아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도전을 하기에는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현실과 이상의 합의점을 찾아 병원을 퇴사 후 도전한 것이 공무원이었다. 평균 100명 이상이 지원하는 지역 단위에서 단 한 명만을 뽑는 간호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한 것이다. 간호사라는 타이틀은 지키되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에서, 타인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시선 안에서 병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도 다녀본 적 없던 1인용 독서실을 끊고 오직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서 구매한 30만 원짜리 노트북 하나에 의지한 채 공무원 국어, 공무원 영어, 공무원 한국사를 달달 외워가며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내가 공무원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다 혹시라도 운 좋게 공무원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실제로 공무원 합격의 문턱은 굉장히 높았고 2수, 3수는 기본이고 7수생까지 본 경우도 있었다. 노량진에서 매일매일을 피 터지게 노력하며 시간과 나 자신의 싸움을 이어가는 청춘들이 너무도 많았다. 물론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차선의 선택 그리고 회피형의 선택으로 도전한 공무원 시험에서 내가 합격 소식을 얻게 된다면 그게 바로 이 사회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간호직 공무원에 도전했던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결정도 있었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내 꿈을 찾아서 어떤 일들을 해볼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시간들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보낼 수 있을까.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쓸쓸하고 외로운 이 선택의 길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사회와 타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어떤 것들을 배우고 성장하며 나 자신을 단련할 수 있을까.


참 많이도 불안했고 가슴이 쿵쾅거려 잠도 오지 않는 날들도 있었다. 괜히 병원을 나왔나 의문이 생긴 날도 있었고 주위 사람들의 날카로운 말과 따가운 시선에 위축되는 날도 많았다.


나라고 처음 도전한 병원 퇴사와 임상 탈출이 즐겁기만 했을까. 걱정 불안이 없었을까. 나는 강심장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뒷배경이 빵빵한 사람도 아니다. 걱정인형이라고 불릴 만큼 온갖 세상만사에 근심 걱정도 많고 예민한 인간이 나였다. 내가 벌어 내 앞가림을 하기도 바쁜 상황. 처음부터 끝까지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놀고먹는 애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거나 재정적인 뒷받침이 지원되어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꿈에 뛰어든 게 아니란 이야기다.


예상했던 전개겠지만 나는 결국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그랬고 나는 공무원 불합격 소식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떨어지면 떨어진 거지 뭐. 그 당시 부모님은 합격컷 점수를 듣고 아쉬워하시긴 하셨지만 내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으니 금방 잊어버리신 듯했다. 어차피 내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있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때 당시 설령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현재까지 공무원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 나는 그 좋다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도 싫다고 두 발 벗고 뛰어나왔을 수 있는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원하지는 않았던 일, 내가 차선으로 선택한 도전에서 공무원 시험 불합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1평 남짓한 독서실 안에서 노트를 복습하고 단어를 외우고 개념정리를 해가며 때로는 밤도 새워 공부를 했지만 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나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시험에 도전한 건 아니었지만 학교 다닐 때 제대로 배워본 적 없던 우리나라 국어 문법과 교과서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 한국사를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웠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불합격해도 괜찮아. 시험에 떨어지는 거지 인생에서 낙오되는 건 아니야. 내가 해보고 싶던 공부를 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물론 오답이 연속으로 체크될 때면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문제집에 동그라미가 늘어나는 날이 많아질수록 하루하루 공부에 흥미가 더해졌다. 모든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지금 이 시간, 이 독서실 안에서 내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는 모든 공부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언젠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에게 도움이 될 거야. 어디서 어떻게 인연이 맺어질지는 모르는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시험에 불합 후 나는 한 달이 되지 않아 여성병원으로 다시 취업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또 임상에서 일하며 다시 몇 년 후에는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 형태와 파트만 바꾸어 임상 간호사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 서른을 앞둔 한 해, 또다시 임상 탈출 계획을 세웠다. 이전보다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계획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조금 더 치밀한 행동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나이트킵 간호사로 야간 근무만 2년 넘게 하며 결과적으로 운동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오후 9시가 되기 전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인계를 받고 나면 밤을 새워 재원환자를 돌보고 각종 문서 작업을 처리했다. 마지막 차팅을 끝내고 라운딩을 돌고 인계까지 마치고 나면 대략 아침 8시였다. 퇴근하자마자 잠도 못 자고 곧바로 학원으로 이동하여 이론과 실습을 병행했다.


하던 일이 있었기에 동기들처럼 많은 연습시간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채워야 하는 필수 학습 시간 동안 인체해부학, 기능해부학, 질환학을 배우고 나면 점심시간이 지나서까지는 개인 운동 연습과 모자란 부분을 학습했다.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학원을 나서면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였다. 그렇게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씻고 밥을 먹고 나면 오후 5시에서 6시가 되었다. 음식물이 소화되든지 말든지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져 눕기 바빴고 두세 시간의 수면 후에 나는 또다시 야간 근무를 위해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이 기간이 대략 1년이었다. 하루 평균 4시간 정도의 수면만을 이어가며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나의 임상 탈출 계획과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후 나는 임상을 탈출했다. 꿈에 그리던 퇴사였다. 마침내 병원이 아닌 다른 직업군으로의 전향이었다. 이직이 아닌 전직. 간호사가 아닌 운동 강사로서의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제 더는 3교대에 쫓기며 살지 않아도 되었고 낮과 밤이 바뀐 채로 언제 해가 뜨고 지는지도 모르는 야간 근무자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꿈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부서져버렸다.


코로나가 터졌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공황에 빠졌다. 그야말로 처음 겪어보는 팬데믹 상황에서 뉴스는 날마다 새로운 내용으로 도배되었고 정책은 수시로 변화해 갔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사적 모임 금지, 실내시설 마스크 착용 필수,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매일매일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문화 체육 시설은 기약 없는 휴업을 이어가다 마침내 폐업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운동 강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임상 탈출에 실패했다.


퇴직금을 깎아 먹으며 기약 없는 백수로 살아가는 것 또한 무서웠고 전 세계가 코로나의 공포에 떨며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통을 겪어가는 뉴스 기사들을 접하면서 나는 수많은 고민에 빠졌다. 임상 탈출을 했으니, 나는 더는 병원과 관련 없는 사람이야. 코로나든 어떠한 바이러스든 그 무엇이 찾아와도 나는 다시는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결국 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과 맞물려 임상 탈출 3개월 만에 다시 종합병원으로 내 발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운동 강사로서 기약 없는 일자리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의 공포는 임상 탈출 시도 실패에 그쳤던 과거 내 기억을 들추고 올라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또한 내 주변과 사회 뉴스면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고통받는 환자들과 보호자 소식을 듣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지금 내 꿈 하나 찾겠다고 병원을 뛰쳐나오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다. 모자라는 일손, 피로누적을 호소하는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바로 그들이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병원을 나가서 뭘 하겠냐.”

“지금 시국도 이런데 병원으로 돌아가자.”

“코로나 끝나면 다시 운동 강사든 뭐든 시작하면 되지.”

“어찌 보면 이게 내 운명 아닐까. 제대로 뭘 해보기도 전부터 이러네.”


결국 나는 또 한 번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이력서를 지원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간호부장님과 바로 면접을 본 후 곧바로 병원으로 출근했다.


“이 시국에 입사 결정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마워요. “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 몇 달만이다.”를 외쳤다.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문제 상황으로 인해 내 발로 다시 병원으로 걸어 들어왔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나는 곧바로 이 병원을 나갈 거야. 다시 임상을 탈출할 거야. 진짜 내 꿈을 찾으러 갈 거야.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생각보다 장기간 이어졌고 점차 나는 과도한 업무와 또다시 의료 시스템의 한계에 부딪치며 내 꿈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서서히 나를 잃고 무기력해져 갔다.


처음에는 두 달 정도면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코로나 상황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내가 2년이라는 시간을 더 넘게 병원에서 보내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더는 공포가 아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게 되면서 그때부터 또다시 나는 슬슬 임상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결코 붙잡히지도 않을 거고 내 발로 들어가지도 않을 테다. 이번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한 시간관리까지 계획했다. 퇴사를 계획한 지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반 년간의 시간 동안 운동 강사로서 투잡을 이어갔고 마침내 나는 병원을 퇴사했다.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 운동 강사로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1년 정도는 즐거웠다.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이 괴롭고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기에 즐기면서 일을 했다. 꾸준하게 일한 만큼 경제적인 보상도 주어지고 주말에는 내가 원하면 쉴 수도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루 평균 10개 이상의 수업을 하며 많게는 13개까지 수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결국 내 몸에 무리가 왔다. 매번 달고 살던 근육통과 기왕력이 있는 디스크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성대결절을 얻게 됐다. 목소리를 쥐어짜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고 침을 삼키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힘들어졌다. 목소리의 변화는 가족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도 나를 못 알아보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 누구세요? 거기 oo휴대폰 맞나요?”


거칠고 투박한 음성과 쩍쩍 갈라지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아가며, 수업 시에는 마이크를 착용하며 성대결절 치료를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수업 개수를 줄이며 전보다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심하게 손상된 몸뚱이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병원 검진 시 발견된 폐 촬영 사진에서는 폐 사이즈가 비이상적으로 늘어나있다는 소견과 함께 폐쇄성 폐질환이 의심되니 큰 병원 진료까지 권유받았다.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도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지. 세상이 진짜 나한테 왜 이래...”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많은 돈을 벌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병원에 가져다 바치며 삶의 무상함을 또 한 번 느끼기도 했다. 큰 병은 아니라고 하지만 평생을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니 자기 전 침대에 누워있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후 퇴사를 마음먹었다. 일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지만, 그건 내 건강이 멀쩡할 때의 이야기였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였다. 크든 작든 내 몸에 문제가 생겼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통증과 아픔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하늘에서 더는 내가 이제는 쉴 타이밍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모든 일을 관뒀다. 그렇게 간호사도, 운동 강사로서도 모든 업무에서 손을 뗐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직장과 집만을 오가며 10여 년을 보내느라 마땅한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던 나는 그렇게 2024년을 철저하게 나 홀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막연한 임상 탈출을 꿈꿀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찾는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병원에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진짜 나‘라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내 진짜 꿈을 찾아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진짜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진짜 나‘ 수업을 수강했다. 그리고 그 수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 ’진짜 나‘ 수업의 선생님은 때로는 책이고 성공인의 일화이며 명상과 마음 챙김, 과거 내가 깨지고 부딪치며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다.


많은 길을 돌아왔고 여전히 나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모든 선택과 도전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은 성공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여정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나를 수행하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이러한 시간들이 모여 그 언젠가 반드시 내가 꿈꾸는 그곳에 두발을 내딛고 서있을 거라는 걸 안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나를 응원한다. 나는 나를 존중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대로 온전한 존재다.


나는 걷는다.

나는 넘어진다.

나는 일어난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계속 춤춘다.

-랍비 힐렐
<책 마음챙김의 시, 류시화 엮음>


나는 계속 걷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또다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나의 이 모든 과정이 미래 언젠가에서 내려다봤을 때 고통의 몸부림이 아닌 나다운 춤이 되어 있기를 소망한다. 아픔을 승화시킨 예술로서 피어난 나만의 춤을 추며 오늘 하루도 나는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또 걷는다.


정보를 모으고 충분히 숙고해서 결정을 내리되,
남들의 말에 꿈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신의 꿈을 좇을 의지가 부족한 사람들은 남의 의욕까지 꺾으려 든다.
거기다 그런 사람들은 은근히 집요하다.
꿈이 너무 크다고, 그러다 다친다고 속삭이는 소심한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지 말자.

내가 내 꿈에 겁먹지 않는 한, 지나치게 큰 꿈이란 없다.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 중에서


“내가 내 꿈에 겁먹지 않는 한, 지나치게 큰 꿈이란 없다.“


이제 나는 작가의 길을 걷는다.


수많은 길을 돌며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나는 이제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오늘도 한 발자국 걷는다. 계속, 걷는다. 걷다 보면 내가 이르고자 하는 길이 나올 것임을 안다. 진짜 내가 걷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며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에 감사한다.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아있음에 감사한다. 결국 나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 낼 것임을 믿는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왔듯이 계속 그렇게 해 낼 것을 안다. 지금껏 내가 해 왔듯이. 계속,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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