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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오름 Oct 25. 2024

우리 물들지 말기로 해

흰 옷과 검은색 옷을 섞어 빨지 않는 이유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먼지 또한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어딘가로 이동을 할 뿐.

그렇지만 그때 나는 길게 늘어선 병동 복도 한가운데서 파란색 쓰레기통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이 더는 재활용도 되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고.


차라리 저 쓰레기통 안에라도 처박힌 쓰레기라면 더는 이리저리 구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외부세상과 단절된 파란색 쓰레기통 안에서 여러 가지 이물질과 먼지 친구들과 함께 섞여 우리들만의 유대감이라도 공유할 텐데.


<<잡니가야>>라는 불서를 보면, 부처가 고체의 관점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신이 내가 아님을 이렇게 설명한다.

“육신은 내가 아니다. 만일 육신이 나라면 육신은 고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육신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수, 상, 행, 식 모두 내가 아니며, 최종적으로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 페이융 <금강경 마음공부> 중에서


마인드컨트롤이라는 말은 사실 참으로 내뱉기 쉬운 단어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것처럼 결코 마음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내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이리저리 휘청이며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가만히만 있어도 마음 안에서 나쁜 생각이 피어오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감정은 나 스스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 30대가 되었다.


그러나 20대의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부정적인 언어를 처리하는 방법도 몰랐고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또한 몰랐다. 그저 맨 땅에 헤딩하듯이 온몸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나에게 날아오는 비난의 돌멩이들을 두드려 맞고 있었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원 전부터 너를 위해 정해져 있는 것들이고, 원인들의 연쇄는 영원 전에 너의 실존과 네게 일어날 모든 구체적인 일들을 한데 엮어서 짜놓았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지적과 비판 그리고 비난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아니 사실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나는 이렇게 사람 면전에다 대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은 아니다.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다. 설령 내 말이 100퍼센트 맞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과감하게 그리고 도전적으로 내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다.


그렇지만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전 동의하지 않아요.)와 같은 의사표현을 할 수는 있었다. 설령 앞에서는 상대의 의견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비난의 화살을 허용한다고 했을지라도 돌아서자마자 바로 내 가슴에 꽂힌 화살을 제거할 수는 있었다.


그랬다면 상처가 곪아 썩어가지는 않았을 테다.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은 피하면 그만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재수 없게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면 살짝 아프기는 하겠지만 화살을 뽑아버리면 그만이다. 이유 없는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고 있을 이유 역시 단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학교라는 알을 이제 막 깨고 나온 사회초년생에게는 나를 위한 합당한 지적과 비판 그리고 이유 없는 비난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럴 여유가 없다.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세상이 매우 좁은 탓이다. 겪어보지 않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일들과 환경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탓이다.


이제는 안다.

100퍼센트를 확실하게 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도 80퍼센트 이상은 안다. 그만하면 꽤 괜찮은 확률이라고 생각한다. 80퍼센트.


나를 향하는 말들과 표정과 어떠한 행동에서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인지, 그냥 나를 비난하고 싶어 툭툭 던지고 내뱉는 말인지 이제는 어렴풋이라도 안다.


“기 죽이려고 그랬어요.”

“그냥 별 다른 뜻은 없었어요. 다들 그렇게 하니까...”


실제로 퇴사 면담 시 내가 전해 들었던 이야기다.

신규 간호사 기를 죽이려고 그랬단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남들도 똑같이 하니까 그렇게 했단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았던 엄마는 늘 세탁 전에 옷 색상을 구분해 바구니에 넣었다.

함께 섞여 있으면 나중에 골라내기가 어려워지니까.

자칫하면 이것저것 섞여 들어가서 오염이 되니까.

그래서 하얀 옷은 검은색 옷과 함께 빨지 않는 거였다.

하얀 옷은 검은색 옷에서 흘러나온 찌꺼기와 탁한 물에 쉽게 착색되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기게 되니까 그런 거였다.


옛말에 근묵자흑이라고 했다.

난 그 무리에 섞여 들어가 6개월 후, 1년 후에 그따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랬어요.”

“저도 똑같이 당했기 때문에 그랬어요.”

“보고 배운 게 이거라서 그렇게 했어요.”


난 그렇게 불쌍한 사람으로 성장하며 살아가기 싫었다.

내 고통은 여기서 끝내리라.

이 악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내가 이 태움의 문화를 처단할 수는 없더라도 사람의 기를 꺾는 것이 아니라 나쁜 태움 문화가 점점 더 에너지를 받아 날고 기고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악습의 기를 꺾어놓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너 여기 나가면 아무 데도 못 들어가. 이만큼 좋은 병원이 또 있을 줄 알아?”

“너 앞으로 이 바닥에서 병원 못 다니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네. 그러세요.

마음대로 해보세요.


여기가 아니어도 갈 곳은 있고요 뭐든 할 수 있답니다.

간호사 해도 좋겠지만 아니어도 뭐 상관은 없답니다.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하는 거잖아요.

당신들이 제 앞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큰 착각이고 오만한 생각이랍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받았던 유니폼까지 토해내며 온갖 문서에 지장을 찍고 간호부장실을 나왔다. 병동에 들어가 캐비닛에서 내 물건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으며 쇼핑백에 몇 안 되는 짐을 꾸렸다.


병동 스테이션에 앉아있는 인턴선생님과 레지던트선생님이 보였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이 몇 번 드레싱 카트를 끌던 선생님이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행복하세요 선생님.”


눈물이 핑 돌았다. 본인도 분명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부딪치고 깨지고 있었음에도 나를 위로하고 격려했던 그 인턴쌤. 아마 그 선생님은 분명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어 현재도 환자와 의료계를 위해 애쓰고 계실 것이다. 혹여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나는 그 선생님의 행복을 진심으로 소망한다.


손에 쥔 쇼핑백을 들고 스테이션 앞에 섰다. 마지막이지만 평생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이 마주쳤던 프리셉터 선생님. 그리고 그 옆으로 듀티 차지 선생님과 몇 명의 선배 간호사들. 마지막 수간호사 선생님까지. 그 아무도 내 인사에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외롭지 않았고 쓸쓸하지도 않았다.


영원히 안녕이다.

잘 살아라.

이왕이면 너무 늦지 않게 본인들의 행동들을 돌아보길 바라고.

평생을 못 깨우치고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뭐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이제 정말 끝이다.

안녕.

고생했다. 정말.

이제 해방이다.

나는 자유다.


이렇게까지 신난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설 줄이야.

병원 1층 로비에서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커피 한 잔까지 사 먹었다.

내가 죽을 만큼 아프고 급한 응급 상황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이를 갈며 나왔던 그 병원.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난 아직도 그 근처를 가지 않는다. 그때처럼 죽을 만큼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하며 나를 갉아먹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동네와 직장 근처, 병원 이름들까지 모두 내 기억에서 많이 잊히고 있을 뿐이다.


더 좋은 곳을 가고, 더 예쁜 풍경을 눈에 담고, 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며, 더 많이 웃고, 더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데 집중한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전 기억이 생각나는 날에는 그렇구나, 오늘은 이 기억을 떠올렸구나. 생각하며 나의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곧 흘려보낸다.


어차피 지나갈 것을 알기에.

고통의 시간 속에 있었지만 그 시간 안에서도 무언가 배운 것이 있기에 그 성장통에 감사하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던 과거 시간에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또 마음을 흘려보낸다.

그러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결국,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나의 마음에 난 상처를 계속해서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내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아팠던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후에 연고를 바를지, 약을 먹을지 적당한 치료를 하며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다보면 어느새 상처는 아물어있다.

흉터는 남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상처가 곪아 썩어가 내 일부를 도려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한 용서.

나를 위한 내려놓음.

나의 마음이 물 흐르듯 흘러가기를.

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처럼 내 마음도 편안하게 흘러가기를.


나는 여러 인연이 합쳐진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그런 나에 무엇 때문에 집착하는가?
그러니 최고의 ‘집착하지 않음’은
바로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 페이융 <금강경 마음공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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