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각자는 그 어떤 누구도 힐링해 줄 수 없다.
[힐링] Healing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본래 상처 치유를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나아가 현재는 신체적, 정신적 상태의 회복과 심리적인 안정감, 평온함을 주는 어떠한 행위를 이야기할 때도 사용된다.
힐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일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기도 하며 예쁜 옷과 비싼 가방을 구매하는데 돈을 쓰기도 한다. 하루 온종일 게임을 하기도 하고 국내로 해외로 훌쩍 떠나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든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받을 수 있는 각자의 힐링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힐링을 받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힐링을 주고 싶어 하기도 한다. 경청하기, 위로해 주기, 술 한잔 사주기, 맛있는 식사 대접하기, 편지 쓰기, 글쓰기, 용돈 주기, 선물 공세 등으로 누군가의 힘듦과 아픔에 공감하며 그 사람이 힘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기도 한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힐링을 주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타인의 아픔과 힘듦에는 잘만 공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의 힘듦과 아픔에 대해서는 굉장히 야박하게 구는 사람들이 많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내불남로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이다.
타인이 나에게 실수하는 것은 괜찮지만, 내가 타인에게 실수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나에게 선 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몇 번은 참고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내가 타인에게 선 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타인이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는 것은 괜찮아도 나는 단 한 번의 질문 외에 같은 물음을 뱉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타인이 팀 프로젝트를 망치는 건 화가 나고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거니 이해하지만 내가 팀 프로젝트를 망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퇴사를 생각할 정도로 책임감이 막중한 일로 느껴진다.
타인에게는 관대한 편이면서도 유독 내가 나에게만은 절대적으로 예민하고 강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런 경우 본인의 기질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부분에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나 자신에게 굉장히 악영향을 끼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고 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첫 직장을 자발적으로 퇴사한 이유 중에는 나의 강박적 사고, 완벽주의 성향도 한몫했다고 본다. 물론 언어폭력을 포함한 선을 넘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모든 걸 100퍼센트 내 잘못으로 여기고 나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 에너지 뱀파이어중에는 수많은 직장 동료들도 있었지만 나 자신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 병원을 퇴사 후 두 번째, 세 번째 들어갔던 병원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 넘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언어폭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규라면 마땅히 모를 수 있고 또 그렇기에 부족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받으면 그 점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두 번, 세 번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는 누구라도 한 번은 겪었어야 할 당연한 실수와 무지에 대해서 지적을 받을 때면 몹시도 괴로워했다.
선생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도 못한다고 또 속으로 나를 엄청 욕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근무가 끝나고 따로 나를 불러내서 혼내지는 않을까. 내가 없는 곳에서 나 때문에 일이 힘들어졌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별별 생각으로 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음에도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 메모와 필기에 무섭도록 집착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신규 간호사 2년 차 때까지는 날마다 근무했던 인계장과 투약리스트, 메모수첩을 들고 출퇴근을 하며 잠 잘 때도 옆에 끼고 잤었다. 언제라도 전화벨이 울려 선배가 어떤 환자, 어떤 처방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늘 긴장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더 빠른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 시기는 2년에서 3년 주기로 나를 강하게 치고 갔다. 얼마나 세고 거친 바람인지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휘청이며 다리가 꺾인 후에는 좀처럼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정형외과 파트에서 여성병원으로, 그리고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또다시 종합병원 정형외과 파트로 이직을 반복하며 새로운 공부와 임상 데이터를 쌓아가며 실전 임상 경력을 늘린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 파트를 옮긴다는 것은 그만큼 익숙한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또다시 배워가야 하는 과정이 수반되기에 때때로 귀찮고도 피곤한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런 내 결정을 지지해 주고 응원해 준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직을 반복하며 만났던 차가운 말들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간혹 내 자존감을 깎아 먹기도 했다. 주로 한 직장에서 꾸준하게 일하지 못하는 나에게 분명 문제가 있을 거라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질 때였다. 그럴 때면 나의 도전이 그들에게는 어떠한 의미에서든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듯했다.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시작이 어떠했고 걸어온 길이 어떠했든지 간에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걷는 길이 결코 편한 길이 아님을 알고 있다. 어차피 나라는 인간은 아주 어릴 적부터도 탄탄대로 뻥 뚫린 고속도로를 걸어오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꽤 오랜 시간 걸어야 했고 비포장도로를 신발 하나 없이 맨발로 걷기도 했다. 표지판도 없는 도로 위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고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어 어디에다 물을 곳도 마땅치 않아 그저 앞만 보며 무작정 걸어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갈래길이 나왔고 어떠한 길로 가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수많은 길을 걷고 여러 번의 선택을 마주한 끝에 현재 이 자리에 와있다. 간호사로서 기쁜 일도 있었지만 슬픈 일도 많았고 힘들었지만 보람을 느낀 일도 많았다. 병원에 있든 밖에 나와있든 아픈 사람들을 보면 더 많이 시선이 가고 그들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머리를 싸맨 적도 많다. 그들을 힐링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며 느끼게 됐다.
나는 누군가를 힐링해 줄 수 없다.
그 어떤 누구도 타인을 완벽하게 치유해 줄 수 없다.
타인을 힐링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그저 나의 바람일 뿐, 그저 나 역시도 누군가의 위로와 응원을 바라는 한 사람임을 알게 됐다.
저마다 누군가를 힐링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 있을 테다. 하지만 그 누구를 힐링해주기 이전에 우리 모두 누군가의 힐링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무한한 사랑을 퍼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받아도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힐링은 결국 타인이 아닌 내가 나를 알아차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항상 나에게 집중했다.
늘 나 자신에게 열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한 조각도 살아보고 내 안의 뭔가를 세상으로 내보내며 세상과 관계를 맺고 투쟁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