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늘 전조증상이 있다.
아프니까 연차를 쓴다
혹은 몸이 안 좋아서 월차를 쓴다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의료진이 그럴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
사람이 아프면 어디 가니?
병원이요.
그러니까. 잔말말고 나와. 너만 아픈거 아니다. 병원이 직장인데 출근해야지.
네.
위 대화는 실제로 내가 임상에서 근무시절 수간호사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조금 더 심한 말을 덧붙이긴 했었지만 생략한다. 굳이 지나간 일에 또 한번 마음을 베이고 싶지 않은 이유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플 수도 있고 또 약을 먹는다고 모든 통증이나 질환이 단시간에 가라앉는 것도 아닐 때가 많다. 이유를 모르겠는 증상이 발현될 수도 있고 증상과 진단명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야말로 사람이 아프다는 건 어떠한 원인 때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변수가 너무도 많이 존재한다는 거다.
성인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입원을 했던 건 아마도 2014년으로 기억한다. 봄이 지난 초여름 정도로 기억하는데 날도 더웠고 1년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신규 간호사로 불리는 위치에 있었기에 근무 조절부터 모든 것들이 다 눈치가 보이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머리가 어지럽고 관자놀이 옆부분이 띵한 느낌이 계속 되었다. 두통약을 지속적으로 먹어봤지만 별다른 호전이 없었고 불규칙적인 3교대 근무와 나이트 근무를 끝내고 다시 출근을 했을 때는 이미 고열과 현기증이 심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데이 근무는 마쳐놓고 외래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갖가지 검사와 피검사 및 MR촬영 후에 나는 스물 네살의 여름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당장 수술이 필요한 목디스크는 아니었기에 자세교정과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만 잘 해준다면 크게 문제는 없을거라 말씀하셨던 원장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내 생활은 또다시 3교대와 월 기본7개에서 많게는 10개 가까이 나이트 근무를 반복하며 불규칙한 근무 패턴, 적절하지 못한 수면 습관으로 불면과 두통이 심해졌고 그로 인해 목 뻐근함도 나날이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규로 근무할때는 특히 더, 보통 사람이라면 흔히 겪지 않는 일들을 단시간에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된 일련의 사건들로 당시 함께 근무했던 차지 선생님과 당직의를 비롯하여 해당 듀티 근무자들 모두가 오프날이면 경찰서를 왔다갔다하며 조서를 작성하고 그 날의 진술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고 심지어 근무중인 날에는 병원으로 형사분들이 나를 찾아와 독방에서 한시간 가까이 조사를 이어가던 때가 있었다.
정확한 단어는 모른다. 그렇지만 스물 네살의 나에게 경찰, 형사, 경찰서, 조사, 조서, 진술, 보호자 진술, 내용증명, 증거 확보 등등에 관한 여러가지 단어들을 지속적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정신적 충격이 전해졌던 것 같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도 이러한 일들에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마치 내가 엄청난 죄인이 된 것만 같은 죄책감과 무기력함에 그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혹시나 오해하실까봐 이야기하자면 나뿐만 아니라 당시 함께 일했던 의료진들 역시 법적으로 처벌 받을 행동, 즉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부도덕한 행동 일체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근무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맡은 일을 했을뿐이고 한 사람의 거짓말이, 몇 사람의 입을 통해 부풀려진 이야기들이 점점 더 커지면서 사건이 운 나쁘게 꼬였고 그들에 의해 소송이 제기된 이상, 조사를 착수해야했기에 참고인으로서 1년 가까이 경찰서에서 부름이 있으면 그 부름에 응답해야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거의 1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이어진 이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경험 후 나는 사람에 대한 회의감, 배신감이 너무도 크게 밀려왔고 결국에는 간호사로서 내 사명과 비전에 대해서도 엄청난 회의감과 억울함 그리고 절망감 비슷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왔다.
내가 이러려고 간호사가 되었나.
나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간호하고 돌보고 살리겠다고 애쓴 기억밖에 없는데. 왜 내가 죄인인것만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걸까. 왜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까. 나는 아픈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려하고 마음을 다했는데 왜 그 누구도 내 마음은 들여다 봐주지 않고 나를 몰아붙이는걸까. 내가 뭘 잘못했지? 끝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후 사건이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소송 역시 원만히 해결되었지만 내 마음 속에 깊게 남은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사건들이 종결된 이후 병원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병원 출근만 하면, 병실 문만 열면 그 때의 알람 경고등 소리와 모니터기계가 나를 잡아 죽이려는 것처럼 달려드는 것만 같았고 병실 바닥을 쳐다보면 무릎을 꿇고 앉아 헉헉거리며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탈진 직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앰뷸런스를 타고 급하게 이동하며 이리저리 부딪쳐 창문에 어깨를 박고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와중에도 깍지 끼운 두 손은 심폐소생술을 이어가던 절박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그 공간 안에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시간이 꽤 흘러 2016년, 나는 신생아실에서 근무 중 극심한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급하게 응급실 진료를 받게 되었다. 스트레쳐카(들것)에 실려 검사실로 이동하는 와중에 불길한 생각이, 내 안의 어떠한 확신이 자꾸 스물스물 올라왔다. 어쩌면 몇년 전부터 예상되었던 결말일지도 모르는 진단명은 그렇게 나를 예고도 없이 빠르고 아프게 강타하며 찾아왔다.
목디스크 파열.
의사 선생님은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고 수술 말고는 별다른 치료 또한 없다고 했다. 그저 통증을 잠시 가라앉혀주는 정도의 증상 완화일뿐 본질적인 치료는 수술을 해야한다고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나이 스물 여섯. 병원의 어떤 원장님도 나를 수술하고 싶지 않아한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젊은 여성, 이십대 중반의 환자.
별일이 없다면 살아갈 날이 아직도 많이 남은 어린 환자.
신규 간호사때부터 익히 많이 봐와서 나 역시도 목디스크 수술의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목디스크 수술 후, 병실 환자가 수술 부위가 덜 아문 상태에서 배액관 제거를 하다가 출혈이 멎지 않아 급하게 응급수술을 들어간 장면까지 목도한 이후 배액관, 흔히 헤모박이라고 하는 그 물건을 볼때도 심장이 벌렁거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위험성이 있는 수술의 대상이 된 거였다.
(의사선생님들의 수술 실력이나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진의 수술 실력과 기술의 월등함, 그것과는 별개로 수술이라는 것은 또 재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위험과 변수가 존재한다.)
하는 수없이 병원을 두세군데 옮겨 다니며 재진료를 받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다 비슷했다.
“저희는 건드릴 수 없어요. 다른 병원 알아보세요.”
수술이 필요하지만, 수술을 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다른 병원을 알아봐라.
참 막막했고 답답했다.
그 때 당시 나는 30분 이상을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극심한 날개뼈와 등 통증, 목 뻐근함과 함께 두통, 어지러움은 기본이고 목과 등의 가동범위 제한, 구토 증상까지 골고루 가지고 있던 디스크 환자였다.
어떻게든 나 역시도 디스크 수술은 피하고 싶었고, 병원에서조차 젊은 여성의 목디스크 수술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는 관계로 그때부터 나는 울며겨자먹기로 보존적 치료를 시작했다.
진정제와 안정제가 섞인 수액을 맞아가며 통원치료를 시작했고 도수치료와 견인치료, 레이저치료, 체외충격파치료 등 안 해본 물리치료가 없었고 어지간한 신경안정제, 근이완제, 진통제는 다 털어먹으며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나는 아주 조금씩 등 통증에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고, 다행스럽게도 수술만이 답인줄 알았던 내 상태에서 운동요법과 재활을 꾸준히 이어가게 되었다. 의사선생님의 권유로 그때부터 필라테스와 웨이트 운동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근력을 키워서 파열된 목디스크 인접 근육과 어깨 근육또한 보강하는 것이 통증 뿐만 아니라 디스크 안정성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따라 그때부터 나는 말그대로 살기 위해 운동이라는 걸 시작하게 됐다.
허리디스크도 마찬가지겠지만 목디스크 역시 완치되는 개념의 질환이 아니기에 계속해서 꾸준한 관리가 필수였다. 다행스럽게도 운동과 재활치료, 경구약 복용등으로 나는 죽을 것만 같던 통증에서는 벗어나게 됐다. 때때로 약 부작용으로 어지러움과 소화불량을 달고 살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내내 안정제가 섞인 수액을 맞으며 잠만 자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버틸만했고 또 날마다 호전되어 가는 증상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병원생활기는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릴 때도 딱히 자잘한 병치레를 하지 않았던 나는 왜 성인이 되서 이렇게 되었을까. 어릴 때 그 자잘구레한 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여기저기 몸과 마음이 아프고 고장난걸까.
나는 2017년의 어느날 심계항진(심박수가 불규칙적으로 비이상적으로 뛰는 상태)과 부정맥, 갑상선 기능 이상으로 저하증과 항진증을 번갈아가며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약물 복용과 함께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치료 과정 중 돌발성 난청이 발병해 2주가 넘게 스테로이드 과복용을 해야했다. 그렇게 무너진 몸의 면역력과 기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먹었던 약들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호르몬 수치에 문제가 생겨 피검사를 달고 살았고 원래도 불규칙적이었던 생리불순은 아예 무월경 1년 6개월을 기록하며 여성병원 정기검진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궁 근종,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
대부분의 내가 겪은 질환들은 원인 불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의학용어로는 R/O, rule out.
정확히 이유를 모른다는 거다.
2년의 시간동안 그렇게 자잘구레한 병치레를 반복하며 양약과 한약, 침치료, 부항과 뜸치료, 물리치료 등 안해본 게 없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일이라도 쉬었으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퇴사 후 휴식이 아닌 이직을 통해 업무 환경만 조금씩 변화를 주었을 뿐, 결과적으로 업무량과 스트레스에 치여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작은 병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또다시 몇 년이 흐른 2022년의 어느날이 되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힘든 날들이 이어졌고 왼쪽 햄스트링 근육통이 심한 것 같다는 진단하에 외래에서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병행한지 한달이 넘어가던 때였다. 출근을 하기 위해 계단을 걷던 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양해를 구한 후, 그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쎄한 느낌은 늘 그렇듯 오차가 없다. 나는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을 아니 이미 입원 수속을 밟아 병실에 도착한 상황을 말그대로 ’인증‘해야 했기에 병실 화장실 앞에서 사진을 찍어 카톡방에 보냈다.
“저 입원해야한대요. MR 응급으로 잡아주셔서 2시간 있다가 촬영해요.”
양쪽 무릎 MR과 CT를 포함해 온갖 검사가 이루어졌다. 피검사는 물론이었다.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큰 병은 아니겠지. 기껏해야 근육통이 심했거나 일시적인 무릎 통증일거야. 그런데 이렇게 아프다고? 아니야. 그래도 별일 없을거야. 나를 다독이며 기분나쁜 상상을 지워버리기 위해 애쓰던 때, 주치의 회진시간이 되었다. 원장님은 나를 외래로 부르셨다. 그리고 들은 MR결과는 생각보다 문제가 꽤 많았다.
정확한 진단명은 양측 무릎 연골연화증.
슬개골에 염증이 심한 상태로 전방십자인대 변성과 퇴화까지 온 것 같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근래 많이 걸어다녀서 그런가? 하체 운동을 조금 세게 해서 그런가? 통증이 조금 심하긴 했지 정도의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은 단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퇴행성 변화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스테로이드 과복용으로 인한 부작용도 고려해야하지만 MR결과로 보았을 때는 최소 6-7년은 되어보이는 무릎 연골의 손상이 있다고 했다.
교통사고나 외상을 입은 경우가 아니라면 지속적으로 무릎에 스트레스가 유발되는 행동이나 자세가 있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무릎에 어떠한 사고도, 외상을 입은 경우도 없었다. 말그대로 퇴행성 변화. 스트레스였다.
흡연도 하지 않고 음주 또한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도대체 왜 뼈와 연골에 이렇게 갑자기 나쁜 일이 생긴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는 변수가 너무 많고 내가 받은 진단명 또한 원인이 되는 변수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 모든걸 한번에 정리할 수 있는 단어는 역시나 룰아웃.
R/O. 원인불명이다.
2022년이면 코로나로 아직 마스크 착용과 함께 보호자 면회가 모두 제한되던 때이다. 입원할 것 까진 생각을 못했었기에 급하게 엄마에게 연락해서 내가 입을 옷 몇 벌과 읽을만한 책, 그리고 근무관련해서 사용할 아이패드를 부탁하고 병원 1층에서 물건을 넘겨받았다.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출근 자체는 보류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업무 자체가 보류된 건 아니었다. 해야할 일들이 있었고 남겨진 일들을 조율하고 처리해야 했다. 이때는 사실 좀 슬픈 마음도 들었는데 임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파도 쉬지 못하고 입원조차 못하고 고열에도 근무를 이어가던 지난 날들을 떠올려봤을 때는 그래도 입원치료를 하고 있는게 어디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을 입원할만한 상태나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총 3일간 입원 치료를 했는데 그 기간동안 머리까지 쉬지는 못했더라도 몸은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단 삼시세끼 꼬박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3일간 느낀 가장 큰 변화였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삼시세끼를 먹는 것,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병원 밥 맛없다는 이야기도 다 옛말인건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병원밥이 맛없다고 컴플레인 하는 경우를 굉장히 많이 봐왔는데 내가 환자가 되어 느낀 바로는... 아니었다.
나는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식사가 꼬박 꼬박 제 시간에 맞춰 나오는 것부터 감격스러웠고 반찬 뚜껑을 열고 메뉴를 확인할 때면 학교 다닐때 식단표도 확인하지 않던 내가 다음 메뉴는 뭐가 나올지 기대감에 부풀어올랐다.
따끈한 흰 밥에 식지 않아 따뜻한 국, 정갈하게 담긴 반찬들과 수저는 정말이지 감동 그 자체였다. 5분안에 후다닥 먹지 않아도 되었고, 밥 먹는 동안 누가 나를 부르며 찾지도 않았고 뛰어 나가서 주사를 놔주어야 하는 일도 없었다. 미친듯이 울려대는 전화벨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유튜브를 켜두고 밥을 먹어도 되었고 귀에 이어폰을 꽂아 넣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밥을 떠 먹어도 되는 식사시간이 너무도 꿈만 같이 느껴졌다. 힐링이었다. 환자가 되어 비로소 느낀 감사함의 시간이었다.
+아래는 입원해있는동안 찍어두었던 병원밥이다. 참 맛있게도 꼭꼭 씹어 다 먹어치웠다.
입원기간동안 면회가 되지 않기에(면회가 되었어도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을테지만) 걱정이 태산인 엄마에게 중간중간 카톡을 보냈었다.
“엄마, 나 이렇게 꼬박 삼시세끼 챙겨먹은게 얼마만인지 몰라.”
엄마는 ㅋㅋㅋ 웃음소리와 함께 밥 잘 챙겨먹고 입원한김에 푹 쉬라고 말해줬다. 병원밥이 생각보다 잘 나온다고 밥값이 얼마냐는 소리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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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일간의 입원 치료 후 외래에서 앞으로의 치료 계획과 경과 설명과 함께 무릎 관절에 비싼 약물(이름은 밝힐 수 없다. 의약품 광고 아니다)주사 치료를 끝으로 나의 입원생활기는 끝을 내렸다. 무릎 내부 깊숙한 곳에 주사 바늘이 들어올때의 뻐근함과 약물이 퍼지는 그 알싸한 느낌은 뭐라고 말 할 표현이 없지만(이후로 외래 치료하며 3차까지 추가로 주사를 맞았다) 부디 이 약물이 퍼져 나의 손상된 관절과 연골 재생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퇴원수속을 밟았다.
경과를 지켜보며 꾸준한 약물치료와 적절한 운동은 필수이고 증상 악화시에는 병원 방문하여 정밀 검사를 다시 받아야한다는 어찌보면 뻔한 답을 듣고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병원을 나섰다. 내일이면 다시 출근을 해야 했다. 아픈건 아픈거고 일은 일이었다. 입원은 입원인거고 퇴원했으면 다시 직장에 나가는 거였다. 그게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그 날 퇴원수속을 밟고 본가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약까지 털어 먹은 뒤 한숨 자기 위해 침대 위에 누워 생각하기를, 입원동안 읽었던 책 내용을 떠올렸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마음챙김의 시.
그 중에서도 몇몇 문장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마 그쯤부터 내가 이런 일상들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다. 환자를 돌보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고 나 역시도 몸과 마음이 아파 돌봄이 필요한 환자라는 것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한 때가 그 때였던 것 같다.
“날개를 주웠다. 내 날개였다.”
나는 어디로 날고 있었고 또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를 생각해 본 적 있었나.
내가 가는 방향은 어느쪽인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느 곳에서는 잠시 쉬었다가 또 어느 곳에서는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목적지를 향해 날개를 접었다 펼치며 멀리 더 높이 혹은 낮게 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날아갈 것인지를 자세히 생각해 본 적 있었나.
입원해있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보내는 힘들고 지쳤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무시한 결과, 이렇게 억지로 어딘가에 나를 묶어놓아야만 혹은 몸이든 마음이든 제한된 상태로 가두어야만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경험하며 ‘생각’이라는걸 하겠구나.
마치 프란츠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벌레가 된 주인공이 된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