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오름 Nov 12. 2024

birth and rebirth

태어난김에 여행

앤은 마릴라와 매튜가 원하던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파양을 당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꿈꾸던 초록지붕 집의 아이가 아니라 달아나고 싶었던 고아원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앤은 말한다.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백영옥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중에서 p 51
23. 11. 샌프란시스코

지난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때로는 일 때문에 그리고 남 때문에.


하지만 어쩌면 그동안 나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해내야된다는 압박감과 완벽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언제나 어깨를 짓눌렀고 숨통을 조여왔다.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친절은 시간이 지나며 이 사람에게 무조건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할 때도 있었고 내가 해준만큼 나를 신경써주지 않는 타인에게 섭섭함과 억울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비판이 아닌 비난을 걸러내지 못해 온몸으로 상처를 껴안고 마음을 베이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면서 마음을 베이고 가슴을 도려낸 것 같았던 자리에 굳게 남은 상처가 딱딱해지며 무뎌졌다.


이전보다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줄 알게 되었고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닌 적당한 친절을 베풀 줄도 알게 되었으며 때때로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1순위로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23. 11. 홀슈스밴드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23. 11. 홀슈스밴드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저요, 오늘 아침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 않아요.
아침부터 그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어야 되겠어요?
아침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빨강머리 앤>

금문교로 향하는 길

작년 11월, 미국을 여행하며 일명 자살다리로 불리기도 했었던 금문교로 향하는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여러 감정이 섞인채로 내 발 밑바닥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금문교 위로 오른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두발로 직접 다리 위를 걸어가며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과거 어느날의 나를 떠올릴 때마다 장면은 수도없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울고 있는 나도 있었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울음을 참으며 꾹꾹 혼자 슬픔을 삼켜내던 어린애도 있었다.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고 불안에 시달리는 초조한 나도 있었고 걱정이 많아 눈이 퀭하도록 밤을 새며 고민에 빠져있던 나도 있었다. 죽을만큼 힘들어서 이제는 살고 싶지가 않다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도 있었고 그 생각을 결심으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나도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시도는 실패에 그쳤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스스로 삶을 끊어내려했던 내가 안쓰럽고도 바보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나만이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책임감도 들었다. 지난 날의 아팠던 나를 기억해낸 순간 눈물이 핑 돌아 뺨으로 후드득 떨어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더 울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저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두어 금문교 위를 천천히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살아있다.

여전히 하루를 살아가고있다.

23. 11. 샌프란시스코

간혹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다. 왜 내가 걷는 길은 온통 흙바닥 투성이고 구불구불하며 여기저기 걸리는 게 많은 안좋은 길인거냐고 툴툴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길을 걸어보았기 때문에 일자로 길게 뻗은 직선의 길과 곱게 포장된 시멘트길 위로 아름답게 채색된 도로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임을 더 잘 안다. 소중함을 알고 감사함을 느낄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앞으로 걸어갈 길에서 또다시 흙바닥과 돌멩이가 잔뜩 섞여 좋지 못한 길을 가게 된다고해도 충분히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용기가 있다.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마땅히 해야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엔 예쁘고 아름다운 빛으로 색칠되어 다채로운 길이 나를 반겨주고 있을 것임을 안다. 이제는 그럴 거라는 걸 안다.


잠시 어둠 속을 걷고 있을지라도 그 어둠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걸, 그 어둠의 끝에서 마침내 더 밝은 빛을 보게 될거라는 걸 안다.

23. 11. 엔텔로프캐년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야망의 제일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더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야망은 가질 값어치가 있지만 손에 넣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자기부정, 불안, 실망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장애물을 거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빨강머리 앤>
23.11 브라이스캐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리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나는 누구이고 또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에 대한 정답은 찾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해답은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태어났을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일테고 나는 어떻게 살고싶은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걸 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를 떠올려보는게 즐거운 생각일테다.


그게 바로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삶이라는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본다. 어려서부터 수학은 관심도 없었고 매번 시험 점수도 낮아서 문제라면 끔찍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다행스러운 건 이 문제는 해답이 없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험에서의 문제풀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가 하기 나름이다.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늘 하루는 어땠고 무슨 음식을 먹었고 기분은 어땠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도 기쁨일테다. 그렇지만 혼자서만 아는 이야기를 간직한채로 나와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나의 생각에 집중해보는 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고 도전하는 모든 시간들도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의 순간 모두가 행복이고 이 행복들이 모여 더 빛나는 인생이 된다고 믿는다.

23. 11. 그랜드캐년

나는 이미 이전에 한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이 인생 2회차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 앞으로 살면서도 인생 3회차, 4회차를 맞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나에게 다시 온 삶의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더 가치있고 즐겁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때로는 설렘으로 때로는 평범함으로 때로는 특별함으로 얽히고설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정말 즐거웠어요.
제 생애에 있어 큰 사건이었단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집으로 돌아온 일이었어요.
<빨강머리 앤>
나는 당신의 집을 떠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제 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게 있어 여행이란 끝없이 집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끝없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내게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집에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 앤에게 마릴라와 매튜가 있었던 것처럼

-백영옥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중에서 p 141






작년 가을 낯선 땅 미국에서 생일을 맞이하고 1년이 지난 오늘.

다시 돌아온 11월 12일, 기존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 재탄생일을 기록하며.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축하해.

태어난김에 잘 살아보자.

선물은 바로 나야 ㅎ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