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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고 채우기

이 글은 ‘오디오 북’처럼 들으실 수 있습니다

by 윤 log
낭독 1
낭독 2


9월 넷째 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다.

이제 가을에 들어섰으니 올 한 해, 일련의 흩어져있던 나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과 집안일, 그리고 식사준비하고 먹는 시간, 갖가지 처리해야 하는 일 등 기본적으로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제외한 내 개인시간은 정해져 있다. 정리의 일 중 굳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될 개인 sns를 우선적 표적으로 삼았다. 나름 내 취향을 구분해서 몇 개의 계정을 만들었었고 그중 꼭 필요한 것만 두고 나머지 계정은 삭제했다. 중요한 기록들은 따로 저장해 두고 오래 유지해 왔던 것 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활동은 잠정적으로 중단하려 한다.

문득 생각해 보니 애써 그렇게까지 나의 일상을 공개적이던 비공개적이던 어딘가에 남겨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러면서 나 조차도 자꾸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열면 제일 먼저 들여다보게 되었다. 알면서도 이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아야 내 무의식에 죄의식까지 얹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 전쯤, 핸드폰에 새로운 메모앱을 깔고 날짜별로 그날의 고뇌와 생각들을 담아두었었다. 이 앱이 두 번째 표적이다. 스쳐 지나가도 될 것들은 삭제하고 남겨두고 싶은 기록들만 다시 나만의 생각주머니에 담고 그 앱을 지우려 한다. 길어서 무거웠던 머리카락을 자른 듯 핸드폰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예전 생각들을 다시 꺼내보며 그때와 다른 새로운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이 주변을 정리하는 것처럼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계절에 맞춘 것 같은 행동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닥치게 될 미래의 일,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이젠 나에게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 (나이가 이제 제법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부터 인지하고 있어야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지금 당장에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던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천천히 나의 마음을 가다듬는 작업이 먼저인 것 같다.


최근 김영하 작가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읽었다. 더 정확하게는 들었다. 자연스레 예전에 재밌게 봤던 알쓸시리즈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알쓸인잡’ 주제는 시간이었다.

아래 글은 그 영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의 요약이다.




'시간이 중요한 자본이 된 현대사회.

다른 것들은 불평등할 수 있어도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자본가들은 남의 시간으로 돈을 번다.

사용자가 SNS에서 '좋아요'도 누르고 뭔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어딘가의 부자들의 시간은 늘어나지 않지만 돈이 늘어난다. 그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회사의 주식은 오른다. (사용자가 많을수록 조회수가 많이 나오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광고도 더 많이 붙기 때문이겠지) 스마트폰의 추천 알고리즘의 목표는 어제보다 오늘, 1분 더 sns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1분이라도 더 보게 만드는 것‘

현대사회에서의 '시간'이란 가장 평등하고 희소한 자원이 될 수밖에 없다'

[알쓸인잡 중에서]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남 좋은 일만 했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이런 활동으로 인맥을 얻기도 하고 그 시간만큼은 즐거운 일이 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관리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이제는 그 시간을 끌어모아 나에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기회도 주고 하고 싶었던 것들에 더 다가가기 위해 힘써야 할 때인 것이다.

우선 9월, 그 희소성 있는 시간을 나에게 마구마구 투자하는 중이다.

그 첫 시작으로 독서를 꼽겠다.



4권의 책 완독

책이란 본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맛으로 읽는 건데 난 그렇게 하기까지가 어쩐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 행위를 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빼야 하는 게 못마땅하기도 했고(독서가 취미가 아니라는 증거) 나한테 안 맞는 책이면 왠지 시간낭비같이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년 전, sns에서 공구할인가로 스토리텔 1년 구독권을 구입했었다. 오디오 북은 우선 두 손이 자유롭다. 집안일을 하며, 카페 가는 길에, 도서관 가는 차 안에서, 뜨개질을 할 때에도 책이 저절로 귀를 통해 들어온다. 그래서 마음먹고 한 권을 골라 들어보았다. 한 성우분이 낭독하는 외국소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소설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고 내용도 딱딱하게만 들려왔다. 왠지 그냥 어색했다. 끝까지 다 듣긴 들었지만 다음엔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1. 첫 여름, 완주 (김금희)

그러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8월 말 즈음 배우 박정민이 차린 무제 출판사에서 듣는 소설이라는 슬로건으로 '첫 여름, 완주'라는 이름의 소설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책 표지에 끌렸다. 무언가에 놀란 듯한 귀여운 소녀의 눈이 아주 커다랗게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었다. 진입 장벽이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재밌다는 추천도 있었고 성인이 되고 지금까지 소설 속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오랜만의 도전이기도 했다. (위의 경험도 한 몫했고) 이번이 어쩌면 나와 맞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민 배우가 선택한 작가분이라는 점, 그리고 그 소설을 배우들이 연기하며 낭독했다는 '오디오 북‘이라는 것이 나를 소설 속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배우들이 연기하는 낭독을 들으니 글이 영화 시나리오가 되고 대화가 대사가 되어 내 귀에 꽂혔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사투리라니, 안 좋아할 수가 없지 않은가. 최양락 아저씨는 진짜 찐 충청도 분이신데 새내기 출판사 대표이기전에 배우로서 코미디언을 캐스팅하는 박정민 대표의 안목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딸과 함께 깔깔깔 웃으며 같이 들었다. 끝나고 아쉽기까지 했다.

이 아쉬움을 달래기 무섭게 다음 책이 또 눈에 들어왔다.



2. 쓸 만한 인간 (박정민)

타이밍이 딱 맞았다. 결제는 했지만 자주 이용하지 않았던 스토리텔의 구독을 취소하려 했는데 날짜를 지나쳐버리는 바람에 오디오북이 자동갱신 되었다. 한 달 연장된 스토리텔을 외면할 수 없어 혹시 읽어볼 만한 게 있나 싶어 앱을 열었다. 열자마자 예전부터 궁금했던 배우 박정민의 에세이가 눈에 딱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바로 눌러 청취했다. 그리고 본인 낭독이기에 기대감마저 들었다.

아니, 근데 이거 안 들었으면 어쩔 뻔?!

정말 정말 빠져들었다. 본인 낭독이기도 했고 이 배우의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난 원래 팬이기도 했으니. 그래도 이렇게 맛깔나게 책을 낭독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역시 그는 배우다. 배우가 낭독하는 책은 마치 글이 아니라 그때 그가 경험했던 사건들을 같이 동행하기라도 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솔직하고 위트 있는 이야기가 참 재밌어서 종이책도 사고 그리고 또 한 번 들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잔뜩 짜증이 들어간 그의 얼굴 ㅎㅎ)

낭독하는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매력적인 거지?



3.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이 책은 '첫여름, 완주'를 들었던 윌라에서 들었다. 윌라 독점, 그리고 박정민 배우의 낭독! 동공이 커졌다. 정말? 서둘러 클릭했다.

작가님은 내가 사는 이곳의 국립도서관에서 몇 년 전 강연 때 뵙기도 했어서 내적친근감도 있었고 독서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고 방송출연도 많이 하셔서 어떤 글을 쓰실지 내심 궁금했었다.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했기에 시작도 어렵지 않았고 낭독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이 책은 무조건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럽고 솔직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삶에 대한 생각을 박정민 배우의 목소리로 들으니 몰입감이 상당했다. 마치 그와 그가 일치되고 왠지 젊은 김영하가 읽어주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바로 종이책 구매리스트에 추가한다.



4. 여행의 이유 (김영하)

윌라의 순기능? 덕분에 바로 이어진 이 책. 그 기능은 한 권의 오디오북이 끝나면 바로 이어서 같은 작가의 다른 책으로 아주 자연스레 넘어간다는 것이다. 작가님은 거의 여행자에 가까운 분이셨다. 그래서 이 책도 쓰신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매년 다니신 것도 그렇고 뉴욕이나 캐나다에서 거주하셨고 또 강연이나 방송활동으로 여행자가 될 운명이셨을지도 모른다. 살고 싶거나 가보고 싶어서 그곳에 이동한 것도 여행이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도 꽤 흥미로웠다. 이렇게 연달아 작가님의 책을 두권 이어서 읽으니, 이어서 들으니 작가님 필체의 결이 나와 잘 맞음을 느끼게 되었다. 방송에서 말씀하실 때의 지성과 위트로 이미 난 빠져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음엔 작가님의 소설이 될 것이다. 어느새 한 권 한 권 쌓이는 나의 책장을 보니 무척이나 뿌듯하다.


이렇게 한 달,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값지고 즐겁기까지 하다.

난 적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을 키우다 시간이 흘러 흘러 지금의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앞으로의 나에겐 아주 큰 의미가 될 거라고 믿기에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리라.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의 영역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당연히 불안을 야기한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불확실의 영역을 확실에 가까워지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불안한 미래도 어느 정도는 기대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독서로 한 단계 초석을 다지고 그 위에 조금씩 경험과 도전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올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처럼 멀지만 가까운 미래에 나만의 단단한 탑을 계속 쌓아 올리고 싶다. 오늘도 책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성우분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리고 있다.



(추신)

독자님들의 시간을 아껴드리려 오늘 글쓰기의 내용에 맞게 저도 제 글을 낭독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들으실지 궁금하네요 ㅎㅎ. 어색해서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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