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 깔끔 떨며 조심조심 라면봉지 스무스하게 옆으로 뜯다가 끄트머리에서 팍! 뜯겨서 안에 있는 라면 부스러기 다 튈 때
방바닥에 지렁이처럼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 주우려다 주변 먼지들도 눈에 밟혀
결국 밀대로 온 집안 다 밀어야 될 때
저녁 주방 문 닫고 아이들 잠들면 아주 개운하게 마시려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둔 아사히
(맥주잔에 따를) 생각하며 둘째 아이 재운다고 누웠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옆에서 같이 잠들어 버렸을 때
오늘 요리방과 후 수업 있는 날이라고 흰색 옷 말고 어두운 계열 옷 입고 가라고 했는데 쿨하게 괜찮다며
입고 가더니 기어이 뻘건 양념을 동서남북 제 위치에 이쁘게 묻혀 온 아이 옷 봤을 때
‘거봐, 엄마가 뭐라 그랬어’
출출해서 비빔면 먹으려고 야채 깨끗이 씻어서 가늘게 채 썰고 계란 삶아 껍질 벗겨놓고
면도 시간 맞춰 삶은 후 찬물에 헹궈 탁! 탁! 털어 물기 빼준 후 전용 그릇에 담아
소스 적당히 뿌리고 통깨도 뿌리고 야채 넣고 있는데… 어디선가(쎄-한 느낌이 든다) 들리는 음성.
‘엄마 뭐 먹어?’
그렇게 내 비빔면의 3분의 2는 배꼽시계가 야무지게 울리는 딸아이의 뱃속으로 사라진다.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멜로디.
'아 이 노래 뭐였지? 뭐였더라?? 이거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라며
참기름 쥐어짜듯 생각해 낸 몇 가닥의 가사 검색해 보려고 핸드폰 들었는데
갑자기 ‘엄마!’ 하는 소리에 ‘째앵!’ 하고 악보의 조각이 맞춰지려다 모래알 같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릴 때.
아 되게 찝찝하다.
엄마라는 호칭이 이럴 땐 참 야속하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보글보글 탱글탱글한 면발 맛 좀 보려고 꼬들꼬들하게 라면 끓였는데
반찬통에 있던 김치가 바닥일 때, 무거운 김장 김치통 꺼내면서 면발 다 불면 이것만큼 속상할 때가 없다.
(김치 없음 밥도 라면도 못 먹는 사람임)
도서관에 반납할 책들을 체크하고 에코백에 바리바리 싸서 날짜 넘기지 않음에 ‘오늘도 보람찼다’하고
집에 왔는데 어딘가 구석에서 숨바꼭질하던 한 녀석을 발견. 하루쯤 늦춰도 되겠지 하고 도서관 사이트 내 서재 카테고리 보니 인기 있는 아이라 예약되어 있어서 일주일 연장 신청도 안 되고 반납하러 또 가야 했을 때.
우린 매일 비슷한 루틴 속에 살면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많은 감정들에 휩싸인다.
사소한 기쁨에 웃음 짓기도 하고 때론 뜬금없고 어이없는 상황에 허탈해지기도 한다.
이런 소소한 경험들은 언젠가는 어김없이 잊힐까 봐 또 찾아와 주는 일종의 허망 마일리지.
똑같은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말라는 신호 같기도 하다.
소위 개그 친다고 한다. 난 아이들에게 매 순간 개그를 치려고 한다.
일단 재밌어서 그리고 잠깐이라도 코웃음 치면 그걸로 오늘의 보상을 받는 것 같다.
아직까지 별 것 없는 엄마의 개그력에 잘 웃어주는 아이들이 있어 오늘의 마일리지가 또 쌓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