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설거지할 때 아이디어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하지만 빛을 받을지 못 받을지도 모르는 이 생각들을 어딘가에 바로 남기고 싶은데 내 손은 이미
고무장갑에 꽁꽁 싸매져 있어 쉽사리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것만 닦고.. 이것들만 헹구고…
그러다가 내 머릿속 꿈틀대던 생각들이 서서히 수증기가 되어 증발해 버릴 때가 많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는 잔재들이라도 어디에든 빨리 기록해두고 싶어 핸드폰 달력앱을 열어
오늘 날짜의 다이어리 카테고리에 뭐라도 남긴다.
문장부호도 필요 없다.
통역사들이 동시 통역할 때 본인만 아는 코드명 같은 단어들과 연관된 간단한 명사들만 후다닥 나열
하곤 한다. 그러곤 주어와 서술어를 잘 이어 붙이면 되는데 간혹 잘 안 풀어질 때도 있다. 뭔가를 쓰긴 썼는데
이 단어는 왜 쓴 거지? 또 이건 무슨 글자인 거야?? 하며 내가 썼지만 도통 알 길이 없을 때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깜박 하는 건 알겠는데 이제 내 글씨도 잘 못 알아볼 정도가 된다고? 벌써 그런다고?? 하며 세월을 탓하기도 한다. 이럴 땐 지금 AI시대인데 갑자기 생각난 문장들이 홀로그램으로 창문에 타닥타닥 타자 치듯
나열해 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아날로그를 더 선호하는 사람의 생각을 적어본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 전 냉장고 야채칸 깊숙한 곳에서 일회용 비닐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컹한 무언가를 보았다.
아마도 식탁 위에 반찬으로 새롭게 탄생될 신선한 야채였을텐데 나는 그를 모른척했다.
오늘도 내일도 귀찮다는 핑계를 들며.
저 것을 꺼내면 난 또 주방에 서서 이것저것 한참을 투닥거려야 할게 분명하니까.
근데 지금은 그러기 싫으니까 하며 외면했다.
물러진 그의 몸에서 진액까지 흘러나와 더 이상 모른 체 하는 건 인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어두운 곳에서 그를 꺼냈다. 덕분에 그 야채칸을 깨끗이 청소했으니 그래도 희생정신으로 봐야 할지…
아니 아니 너무 미안했다.
장바구니에 예쁘게 담아 데려올 땐 언제고 왜 냉장고 속에만 들어가면 꺼내기가 이렇게도 힘든지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난 좋아하는 일 앞에서는 주저 없고 누가 하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한번 그 리듬을 타면 옆에서 누가 툭 치기만 해도 가자미 눈을 뜨고 보기도 한다.
나 건드리지 마라, 지금 굉장히 예민하고 초 집중하고 있거든.
이 에너지를 이젠 냉장고 속 또 다른 희생양이 나오지 않게 신경을 좀 써야겠다.
오늘은 냉장고 털러 가야겠다.
며칠 전
32일 동안 나 혼자 매일 필사 챌린지에 도전했었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하루도 안 빠지고 한 권의 책을 노트에 담아냈다.
그 독서 노트와 잘 맞는 볼펜으로 매일매일을 쓰다 보니 어느새 잉크가 다 닳아졌다. 노트를 채우는 기쁨도 물론 컸지만 새것을 사면 끝까지 쓰기 힘든 볼펜을 아낌없이 다 소진했다는 것 또한 큰 의미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또 같은 브랜드의 똑같은 두 번째 펜. 이 또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펜의 잉크가 닳아지는 만큼 밑줄 그은 나만의 문장들을 필사, 손글씨로 되새기며 그 글에 스며들어 나 또한 성장곡선의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에 잘 맞고 내 글씨체와 천생연분인 시그노 0.38 블랙 ‘이 녀석, 나랑 참 잘 맞는구나!’
평생 가자!! 너가 내 마음을 다 빼앗아갔어 책임져.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 다른 임무를 맡기자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악기는 칼림바이다.
학교에서 제공해주기도 하고 나도 한번 배워보고 싶어 온라인에서 따로 구입했었다. 그래서 지금 집에 3대가 어딘가의 서랍 속에 숨 죽이고 있다. 누군가의 손가락에 튕겨져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으련만 이 녀석들도 참 기나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
칼림바의 구성품 중 악기를 예쁘게 진열해 놓을 수 있는 나무 거치대가 있다. 나름 튼튼하고 예쁜 나무의 색을 띠는 거치대. 이대로 잠자고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번 꺼내보자. 가만 보니 무언가를 거치하면 다시 제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집안을 둘러보니 안방 책장에 빽빽이 터줏대감처럼 오랫동안 자기 자리에 꽂혀있는 책들이 보였다. 그리고 뒤늦게 입주해 그 안에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다 그냥 앞에 떡하니 대자로 층층이 누워있는 뉴 세입자들이 내 눈에 포착됐다.
'엇 그럼 너희 중 한 명, 이 튼튼한 거치대에 올라와 볼래? 그럴래?
엇 뭐야! 나무 거치대에 딱이잖아.
그래 당분간은 월세 안 내고 버티는 세입자가 방 뺄 때까지만 거기 있어보자.
그 대신 나랑 가장 눈 많이 맞출 수 있거든. 어때 괜찮지? 정말 잘 어울려'
무인양품 가습기
건조한 겨울, 방안을 촉촉하게 유지하느라 애썼던 유독 햐얗고 둥글둥글 귀여운 모습의 가습기.
추운 날엔 100% 아니 200% 아주 유용하게 본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이 아이는 이제 은은한 조명으로 봄 여름 가을 언제나 침대 옆 협탁에서 밤마다 불을 밝혀주고 있다. 하마터면 겨울잠 무리에 동참할 수 있었으나 첫째의 오뉴월 감기로 다시 수소문해 너의 실력을 보여달라며 다시 이 자리에 자리 잡았다.
왜 이 생각을 못했었을까? 이만한 협탁 조명이 또 없는데 말이다. 사계절 내내 힘쓰고 빛내주는 너. 고맙다.
9월, 가을이 반갑게 돌아오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 잡게 되는 것 같다.
집에서는 물리적으로 정말 안 쓰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구도 새로 배치하며 계절을 맞이한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보면 또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주말 계획을 세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