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은 다섯 살부터이다.
태어난 곳은 서울 용산.
다섯 살 때 살던 곳은 강원도 태백.
그냥 눈 떴을 때 상냥한 목소리가 귀에 윙윙 거렸다.
우리 이모.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우리 이모 목소리이다.
이모는 항상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어느 날 가곤 했다.
내 기억은 다섯 살 때부터이다.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위로는 언니 아래로는 남동생 그 속에 중간이 나였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나는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다섯 살의 나.
우리 집에 항상 과일이 가득했던 기억은 있다.
다섯 살에 나는 과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즐기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원도 태백으로 간 사실은 아빠 때문이었다.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만남.
1970년대에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지역감정이 있었나 보다.
엄마 아빠는 그때쯤 만나셨고 부모님의 반대에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셨다.
지금은 아빠가 엄마를 먼저 좋아했다고 하지만 양쪽 말은 다 틀리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리고 소소한 재미나 기억에 남는 개인적인 일들을 기록해두고자 함이다. 이 글을 통해서 같이 공감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똑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았던 다섯 살의 나.
언니는 항상 똑똑했다. 남동생도 마찬가지.
다섯 살의 나의 시점으로 봤을 때 난 그저 어른들이 부러웠다.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고 싶으면 어디 가고, 결정도 스스로 하고 뭐 아무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섯 살 때 그걸 느꼈던 거 같다.
강원도 태백으로 온 이유는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해서 도망치듯 내려옸다고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난 다섯 살에 태백에 살았고 윗동네 오빠가 굉장히 멋졌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오빠네 집에 일부러 어릴 때도 많이 놀러 갔던 기억이 있다.
항상 겨울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눈밭에서 구르고 눈사람을 만들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말이다.
엄마는 항상 남동생을 케어하기 바빴고 일도 하셨고 아빠도 늦게서야 집에 오셨던 기억이 있다.
다섯 살 그 겨울. 항상 우리 집에는 애완견이 있었다.
지금은 애완견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 당시 표현을 들자면 항상 집에 개 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내 첫 개. 우리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누렁이.
누렁이는 털이 노랗다고 해서 아빠가 누렁이라고 한 거 같다. 누렁이는 컸다. 그래서 누렁이집인 철조망 안에 들어가서 같이 자고 누렁이등에 올라타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섯 살 되던 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누렁이가 사라졌다.
"누렁아" " 누렁아" 어디 있어. 나랑 놀자.
엄청 많이 불렀던 기억이다. 누렁이가 아무리 불러도 멍멍 소리가 없다. 콧물을 흘리고 울며불며 누렁이를 찾았다. 그런데도 없다. 항상 어디선가 나타났는데 없다.
선명한 기억은 내가 누렁이를 찾았던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뭔지 모르겠지만 난 촉이 좋고 꿈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러니 말이다.
전날 저녁 누렁이가 밥도 안 먹고 낑낑대기 바빴다.
"엄마 나 누렁이랑 같이 잘래"라고 때를 쓰고 울며 불었다.
엄마가 그날 저녁 "안돼,. 누렁이 아프니깐 쉬게 두자"라고 말했었고 그런 나를 아빠가 또 달래러 나오셨다.
"누렁이가 아프면 내가 같이 있어주면 돼"라고 말했다.
아빠가 안돼 누렁이가 아파서 혼자 둬야 되라고 아빠가 말했다.
한 고집했다. 때를 쓴 게 한두 시간이 아니었었다. 추운 겨울날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울었던 기억이다. 그날 집으로 들어가서 잔 이유는 분명히 엄마 아빠가 나한테 약속했었다.
"아빠 나 자는 동안 누가 누렁이 데려가면 어떡해?" " 아침에 일어나면 누렁이가 없을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었다. 아빠 엄마가 "걱정 마 엄마랑 아빠가 지켜주면 돼"라고 했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 약속까지 걸고 잔 거다.
그런데 아침에 누렁이가 없다. 아빠랑 엄마를 찾아 온 동네를 휘저었던 기억이다.
누렁이 발견. 분노의 주먹.
여섯 살밖에 안됐지만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성격이 그랬었다. 어릴 적부터 누구한테 지는 걸 싫어했다.
조그마한 태백의 산동네에서 이웃집이라곤 뻔하다.
제일 나를 많이 놀렸던 동갑내기 친구가 사는 집도 이웃집중 하나다.
난 그 남자아이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꽤나 짓궂게 생긴 얼굴이다.
뇌리를 스쳤다. 남동생은 연년생이다. 남동생을 앞세우고 그 집으로 쳐들어 가기 위해 쫑쫑 걸음으로 눈을 밟으면서 걸어갔던 기억이다.
내려가는 길에 썰매를 탈 수 있도록 알맞게 얼음이 얼어져 있다. 그새 누렁이를 찾던 거를 까먹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쌀포대를 가지고 내려왔다. 썰매를 타기 위해서다.
썰매를 실컷 타다 보니 누렁이가 생각났다.
"아 맞다 누렁이" 누렁이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까먹은 거다.
누렁이 생각을 하니 또 화가 났다. 때마침 저쪽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썰매를 가지고 오는 짓궂게 생긴 남자아이가 입을 실룩 대며 걸어온다. " 야! 너 우리 집 누렁이 봤어?" 소리를 질렀다.
"너네 집 누렁이?" " 누렁이는 요기 있지요~" 하면서 한쪽 손에 든 개뼈를 실에 걸쳐서 마치 곤봉처럼 윙윙 돌리면서 이야기한다. " 누렁이 아파서 내가 잡아먹었다! "라고 이야기한다.
쇼킹 자체다. 안 그래도 미웠는데 이놈 잘 걸렸다.
" 야 바보멍청이 말미잘!" 이렇게 욕하고 발로 차서 얼음 위에 넘어뜨렸다.
"네가 우리 누렁이를 먹었다고? 너 거짓말하면 나쁜 사람이야!" 하고 마구잡이로 멱살을 잡았다.
아무도 안 말렸던 기억이다. 그 남자아이의 웃음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내가 먹었다 왜!" " 원래 개는 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뭐 잘못됐어?"라고 말했다.
"네가 먹었다고? 진짜 먹었다고? 입을 찢어버릴 거야!" 하고 그 아이의 입을 양손으로 벌렸다가 주먹을 압안에 넣었다가 손가락을 넣었다가 하면서 "얼른 내놔. 내 누렁이 내놔"라고 했었다.
결국 비아냥 거리는 말만 늘어놓았고 나는 결국 그 남자아이의 눈퉁이를 때렸다.
"아야,. 아야.. 너 가만 안 둬!"라고 하면서 남자아이가 일어나서 집으로 가버린다.
"야 어디가! 누렁이 주고 가!" 소리를 고래고래 쳤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다. 한참을 얼음판 위에서 사투를 벌인 거다. 분홍빛이 눈밭에 물들었다. 아마도 그놈의 피일 것이고 내 주먹에 까인 흔적이 있는 거 보니 내피도 있나 보다. 씩씩 거리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동생은 겁이 많은 편이다. "작은누나 이제 집에 가자. 엄마아빠한테 혼나"라고 나를 달랜다.
"야 너는 쟤가 누렁이 먹었다고 하는데 화도 안 나?"라고 남동생 탓을 해버렸다.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집에도 안 갔다 계속 멍하니 눈밭에 앉아있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저기서 나를 찾는 아빠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동생 이름도 부른다.
남동생이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요" 남동생은 지금도 부모님에게 존댓말을 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다.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나는 존댓말을 안 했다. 왠지는 모른다. 그냥 내 방식이었을까?
어렸을 때 그랬으니 지금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아빠랑 엄마가 달려온 기억이 있다.
"아빠! 누렁이를 00이네 집에서 먹었데" " 00이네 집에 가서 누렁이 데리고 오자" 펑펑 울었다.
아빠가 말했다. "누렁이가 아파서 이제 집에 못 와" "그러니깐 집에 가자"라고 하신다.
이해가 안 갔다. 아프면 약을 주면 되지 왜 안된다는 거지?
아빠가 누렁이가 아파서 약도 먹이고 다 해봤는데 안 됐었나 보다. 그래서 땅에 묻어줬다고 한다.
지금도 사실인지 아닌지 말씀을 안 해주니 모른다. 어른이 된 지금도 물어보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이때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았다.
삼일동안 밥도 안 먹었다. 나름의 시위랄까 누렁이를 데리고 오라는........
하지만 데리고 올 수 없었던 거다.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까... 지금의 말로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표현하지만 그때는 그냥 죽은 거다.라고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 집에 더 이상 개는 없었다. 적어도 강원도에 살 때만큼은 말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다섯 살, 여섯 살의 나는 말괄량이에 떼쓰는 데는 1등이었다.
엄마 아빠도 그걸 알아서 나한테 숨기신 거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날 나한테 맞은 동갑내기 친구네 집에 가서 엄마아빠가 병원비를 낸 것으로 들었다. 눈밑이 찢어져서 다섯 바늘 정도 꿰맸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나한테 어디 다친 곳이 없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도 손이 까였는데 빨간약을 발랐던 기억이 있다.
이때 꼬꼬마 인생 첫 번째 충격이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이때 알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못 먹는 것이 없구나. 개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배고픈 시절이었기 때문이어서? 그냥 그때는 그게 죄가 아니어서? 모르겠다.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쥐면서 다짐했다. 절대 개는 먹는 게 아니라고 사람들한테 말해줘야지.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일은 없겠지? 내가 다 물리쳐 줄 거야. 참 꼬마다운 생각이다. 히어로를 꿈꿨나 보다.
지금은 어떤 동물도 키우지 않는다. 그만큼 책임도 따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게 나의 첫 기억의 스토리의 한 조각이다.
그해 여섯 살의 기억은 나에게 너무 가혹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