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식이 Nov 10. 2024

공동체 생활

부모님 기일

   아버님은 3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사시면서 가족 모두 논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본인만 힘든 일 만 하고 자식들은 농사짓는 힘든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우리 가족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없어서 학교 수업료를 늦게 제출하거나. 못 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 가족 공동체는 모두가 헛되게 지출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이 사시는 것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느끼는 것과 가르침이 있었다.


   아버님은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병이 발병하는 날, 늦은 저녁이었다. 너무 어려서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50 가구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시골이었기 때문에 병원이 있는 읍 까지는 4km  거리였다. 차가 다니지 않는 자갈길이었다.


   그 당시는 동네에 전화가 없었다. 발병하는 날 리어카를 이용하여 읍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시골 병원이라 중풍 환자를 치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산까지 가서 3 개월 가량 치료받으신 후, 고향집으로 오셨다.


   건강 상태은 몸의 절반 즉 오른쪽이 마비 상태에서 회복되지 않으셨다. 집으로 복귀하셔서 참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가족 공동체에 미안 한 감정, 동네 공동체 분들에게 부끄러움 등이 아버지의 눈물을 계속 흐리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3년을 고생하시다 이승에서의 인연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은 아버지 보다 약 40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집에서, 형님집에서, 양로원으로 가시다가  넘어지셨다. 허리를 다치고, 엉덩이 뼈를 다치고 해서 더 이상 일어나지를  못 했다. 그리고 치매가 있어서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약 3년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3년만 제사를 따로 기일날 지내고, 3년 후에는 아버님과 같은 날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다. 바로 그날이 어제였다. 5형제가 어제 부모님 기일 때문에 형님 댁에 다 모였다.


   어릴 때, 부모님들과의 상활 등의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 가족 공동체는 시골 고향에  옛적 살던 곳에 새로운 집을 짓었다. 오 형제가 동일한 부담으로 새로운 집과 텃밭을 만들었다. 약 100평 터에 집은 약 20평, 주차장 30평, 텃밭 50평 정도를 장만하여 가족 공동체가 정을 나누고 있다.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누구나 고향으로 간다. 텃밭을 손질할 때는 한자리에 모인다. 조카들도 모여서 정을 나누곤 한다. 우리 가족 공동체의 즐거움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 삼겹살과 막걸리를 마련하여 가야겠다. 부모님 산소도 가보고 싶다.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 공동체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