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가 내 옆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기자들은 왜 연예인 연애 소식에 다 '열애'라고 쓸까.
왜?
당사자도 아닌데 그 연애가 뜨거울지 미지근할지는 모르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오... 근데 뭐... 새로 시작하는 연인이니깐 엄청 뜨겁겠지! 우리도 연애초반에는 엄청 뜨거웠잖아!
그가 말했다. 뭐?? 감자 너무해! 우리는 지금도 뜨거워! 나는 그를 달래면서도 말했다. 솔직히 우리 연애 초반에는 정말 불타올랐지. 그때는 진짜 잠도 안 자고 떠들었잖아!
그가 나를 처음 만나고 며칠 후 대만에 돌아간 이후, 우리는 매일 전화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몇 마디 나누고 웃음이 터졌다가, 정적이 흐르다 또 대화를 이어가는 어색한 사이었지만 나를 보기 위해 그는 다시 한국에 왔다. 나 또한 그를 만나기 위해 대만에 갔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도 학원에서 알바를 했고 나도 과외를 했기에 두 번 다 48시간이 채 되지 않는 만남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도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우리는 공항이 있는 타오위안 시에서 타이베이로 이동하는 40분이 아까워 타오위안 시에서 놀았다. 생각해 보면 만나서는 더 어색해서 대화도 제대로 못했는데 하루종일 걷고 밥을 먹고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데이트를 했다.
그렇게 2월 중순에 그의 학교가 개강했다. 그가 나에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만나러 한국에 오겠다고 했을 때에도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그가 온다는 문자가 오면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가슴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행복했다.
주중에는 전화와 영상통화를 했다. 언젠가 그에게 연애에만 몰두하지 말고 각자의 삶도 충실하자고 말했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는 나에게 이 말을 들은 그날이 정확하게 기억난다며 이 날 조금 서운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그때 그에게 너무 푹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아마 입 밖으로 뱉으면서도 날 향해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학원에서 일했다. 9시에 일이 끝나서 집에 오면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서 10시가 넘어서 나에게 전화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꼭 집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걸었다. 대만사람들은 아침 5시 반, 6시면 일어나 아침을 시작하기 때문에 10시면 잠에 들었다. 그는 가족들을 시끄럽게 하기 싫어 집에 나와서 전화했다.
나는 그가 씻는 시간이 늦어질까 봐 씻고 나오라고 했고 우리는 늦은 밤부터 새벽 2,3시를 넘겨서 통화했다. 나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씻고 나오면 그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가 너무 많이 걷느라 더 통화하면 다리가 아플것이 걱정되면서도 전화를 끊기는 싫었다. 내가 이제 너무 늦었다고 들어가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 그가 안 들어가고 버텼는데 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주말에는 잠깐의 만남을 가지고 주중에는 몇시간씩 떠드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만은 대학도 아침 8시부터 강의를 일찍 시작했다. 그가 새벽까지 나와 통화하다 들어가서 자면 잘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가 한국에 온 어느 날, 공항철도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고개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는 걸 보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5월 초쯤 전화를 하는데 영상통화 속의 그가 땀을 흘렸다. 벌써 더워? 그는 대만의 5월은 충분히 덥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더위도 잘 타는 편이었다. 그는 대만은 너무 덥고 습해 집에는 하루 24시간 에어컨이 켜져있다고 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와 전화를 하기 위해 씻고 나와 다시 땀을 흘려야했다.
우리 매일 통화 이렇게 늦게 하는건 아닌것 같아. 그가 처음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중엔 우리 일상에 조금 더 집중하는게 좋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매일 밤 통화는 늦게 하지 말자. 일 마치고 집에 가는길에 잠깐 통화하면 되잖아!
그가 말했다. 버스에서는 통화하기가 힘들어서... 버스에서 내려서 통화하면 몇분 안돼.
그 몇분에 잠깐 하자고 하자 그가 고민하더니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응!
그럼... 일단 그래보자. 그리고 너무 아쉬우면 또 바꾸면 되니깐!
버스에서 내리면 집까지 몇분이 걸리냐 물으니 그가 말했다.
음...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돼.
오 진짜? 생각보다 많이 걷는데? 그럼 우리 딱 20분만 통화하자!
그렇게 우리는 매일 저녁 그가 버스에서 내려서 집에 가는 그 20분동안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은 약속이 무색하게도 그는 20분이 지나도 자꾸 자꾸 전화를 끊어주지 않았다.
집에 얼만큼 왔어?
집 가는 길이 너무 길어.... 아직 다 못왔어.
반도 못왔어?
응. 천천히 걸으니깐 아직 반도 못왔네?
그럼... 어쩔수 없네. 집갈때까지 계속 얘기해야겠다!
맞아! 집 가는 길이 너무 길어서 어쩔 수 없는거야!
사실 나도 끊기가 싫어 30분 40분이 되어도 시간을 보면서 모른척했다. 그렇게 그가 집에 가는길은 점점 늘어났다. 한시간이 내 양심의 마지노선이었다. 한시간이 되면 그를 집에 돌려보냈다. 그렇게 그가 집에 가는길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때 그와 전화를 하며 대만의 날씨를 귀로 느낄 수 있었다. 마른 하늘에 갑자기 비가 떨어져서 그가 주섬주섬 우비를 꺼내는 소리나 갑자기 강풍이 불어서 그가 날라갈까봐 걱정이 되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그가 참 고군분투하면서 열심히 통화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는 걷다가 잠깐 벤치에 앉아서 영상통화를 걸기도 했다. 한시간이 되고 그를 집에 돌려보내면 그는 씻고 나와 영상통화를 틀어놓고 조용히 얼굴을 보다가 잠에 들었다.
그러다 언젠가 한국에 온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우물쭈물하며 할말이 있는 듯 했다.
사실 나 이번달내내... 감자한테 거짓말 한게 있어.
거짓말이라니. 마음이 쿵 했다.
뭔데?
사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20분까지는 안걸려.
응?
그것보다는 가까운데 좀 천천히 갔어. 감자가 바로 집에 들어가라고 할 것 같아서...
나는 안도했다. 뭐야 그건 이미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구!
깜짝 놀랐잖아! 그게 뭐가 거짓말이야. 나랑 더 놀고 싶어서 여기저기 다 돌아간거잖아!
그럼 괜찮은거야?
응 당연하지! 그것때문에 걱정했어? 귀엽당
다행이당 히히
그리고 얼마 뒤 나는 그의 본가에 가게 되었다. 그의 집에서 타이페이 시내를 구경하려 구글지도를 키고 경로를 찾는데 뭔가 이상했다. 응?
정류장까지 거리. 45m? 설마...
나는 언니한테 물어보았다. 언니! 혹시 00가 학원일 끝나고 버스타고 집올 때 어디서 내리는지 알아?
언니는 응! 여기 정류장 바로 앞이야. 뛰면 10초! 라고 말했다.
그를 만나 구박했다.
어떻게 된거야!
뭐?
버스정류장! 집까지 뛰면 10초잖아!
그가 흠칫하더니 말했다.
10초는 아니야!
10초가 아니라고? 지도에 45m로 뜨는데?
.... 15초야!
그는 사뭇 뻔뻔하게 천천히 가면 좀 더 걸린다고 했다. 그는 정류장의 위치를 들키고 나서는 더이상 집이 아직 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좀 더 걷고 싶다며 전화를 끊지 않았고 나는 그를 타박하면서도 통화시간이 한시간을 향하는게 너무 아까워 아끼고 아끼며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하는 통화가 왜 그렇게 간절했을까 싶다.
옌수지鹽酥雞
대만식 치킨이다. 대만은 치킨이나 오징어를 튀길때 기름을 붓고 미리 저온으로 바질을 튀겨서 기름에 바질향이 배도록 한다. 대만시장에 가면 닭고기와 함께 두부와 돼지피도 같이 튀겨주는데 튀긴 돼지피는 정말 쫀득하다. 옌수지는 닭고기에 이미 후추와 양념으로 밑간을 하기 때문에 그냥 순살치킨보다는 더 짭짤하고 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