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홍콩에서 민주화의 물결이 일었다. 홍콩에서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자 세계 각국에서 홍콩 시위대에 연대했다. 대만도 역시 연대 시위에 동참했다.
그의 모교 앞 지하 통로에서는 레논벽이 세워졌다. 홍콩시민들이 포스트잇을 붙여 만들어놓은 레논벽을 그대로 따와 대만에서도 만든 것이다. 내가 대만에 갔을 때 그의 가족들도 나를 데려가서 그곳을 보여주었다. 지하도 긴 통로 양쪽이 홍콩을 지지하는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 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그 레논벽은 원래는 대만에서 유학하는 홍콩 학생 단체에 의해 계획되었지만, 타이베이시 시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지하 터널 사용권을 신청해 받아들여져 만들어졌다. 그 이후로는 대만 전국 각지에 대학을 중심으로 레논벽이 만들어졌고 레논벽에서는 중국 학생들의 폭력행위도 있었다. 하지만 대만의 홍콩과의 연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만의 대학생들은 홍콩과의 연대 학생 조직을 만들고 장기적인 연대 시위에 동참했다.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참여했다. 대만인들이 그렇게 열렬히 연대한건 대만 또한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대만이다' 라는 문구를 들고 시위에 나왔다. 홍콩의 지금이 머지않아 대만에서도 닥칠 미래라고 생각했기에 대만인들에게 홍콩은 대만과 동일한 문제에 같이 맞서는 동지였다. 문제를 맞닥뜨린 순서만 앞설 뿐이었다. 홍콩의 학생운동가들은 대만 대학을 방문하여 관심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며 동맹을 다지고 갔다.
머지않아 타이베이의 시위에는 10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대만의 정치인들은 홍콩시위 지지발언을 하며 대만에서의 일국양제一國兩制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일국양제를 거부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홍콩의 시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졌다. 이에 맞서 경찰이 실탄을 발포하고 시위자들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중학생이 실탄을 맞았고 11살 아이가 체포되었다. 시위대는 눈과 목숨을 잃었다. 홍콩의 분노는 대만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대만에서 유학하고 있던 홍콩학생들 중 일부는 홍콩으로 돌아가 시위에 합류하였다. 그러다 대만대학 소속의 홍콩 학생들이 홍콩에서 구속되고 출국이 정지된 일이 있었다. 이에 대만 학생들은 대만에 위치한 홍콩 공관에서 '내 동기를 돌려내라, 같이 수업에 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시위는 크고 작게 여러 규모로 진행되었고 학생 연합을 통하지 않은 소규모의 시위도 많았다. 학생들은 모금을 통해 홍콩 시위를 지원하기도 했다. 촬영을 전공으로 하는 그의 누나는 대학 학보사를 통해 홍콩 학생 취재단에 자신의 카메라를 기증했다. 그 이유는 홍콩 경찰이 학생 취재단의 카메라를 부수고 취재원까지 체포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며칠간 노숙농성에 합류했다. 릴레이로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길에서 잠을 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대만 날씨가 감이 잘 오지 않아 너무 덥거나 추울까 봐 걱정을 했더니 웬걸 그는 며칠 노숙을 하고는 온몸에 모기를 물려왔다. 눈이 파묻힐정도로 얼굴이 퉁퉁 부은 걸 보고 역시 대만의 모기는 무섭구나 싶었다. 한 번은 그가 같이 노숙농성을 하는 친구들을 영상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깜짝 놀랐다. 그에게 농성에 대해 들을 때만 해도 텐트나 하다못해 박스라도 깔고 누울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길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농성단에 다가가 인사를 하고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가방을 멘 채로 눕는 친구도 있었다.
홍콩의 시위는 더욱 거세져 홍콩 경찰은 기어코 캠퍼스 내까지 진입하며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위협했고, 이에 홍콩의 대학들은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대피시켰다. 학교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남아 상황을 중계하며 끝까지 맞서 싸운 홍콩학생들은 부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경찰이 성당 내까지도 무력으로 진입해 시위대를 체포하자 홍콩 시민들은 경찰에겐 최소한의 선조차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홍콩에서 공부하던 외국인 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만학생들도 대만에 돌아갔다. 시위 진압 경찰이 대학을 습격하고 시위하는 학생들을 추격하는 모습은 대만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대만은 이미 1949년 4·6 사건 당시 주둔군 사령부가 캠퍼스에 진입하려고 하자, 어떤 학생도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며 막아내 학교의 벽을 세워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대학의 허가 없이 경찰이 학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대만인들은 학내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폭행하고 심지어는 대학 주차장에서 대학생 시위대가 사망하는 일이 생기자 대피해 온 홍콩학생들을 적극 지원했다.
그의 모교에서는 홍콩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문 학생을 받았는데 예외적으로 수업료를 면제해 주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자신의 거주공간을 내어주기도 했다. 남자친구는 홍콩학생들이 대만에 머무는 데에 어려움을 덜어주도록 하는 일대일 학생 교류 봉사를 했다. 연이어서 대만 전역의 대학에서 홍콩학생들을 받고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면제해 주었다.
하지만 홍콩 민주화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며칠 전 12월 3일, 남자친구가 퇴근을 하자마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동문들이 메신저를 통해 소식을 보낸 것에 대해 최대한 일찍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날 오전,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인 마롱 선수를 포함한 중국 대학생 교류단이 그의 모교에 방문했었다. 그런데 방문 전 인터뷰에서 교류단 중 한 학생이 대만의 프리미어 12 우승에 관하여 '중국 타이베이中國台北'의 우승을 축하한다며, 대만 동포들이 야구 종목에서 '조국'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대만인들은 중국 타이페이中國台北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대만팀台灣隊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그 교류행사는 친중 성향의 마잉주 전 총통이 초청해서 주최한 행사였기에 대만인들은 그 행사가 양안 통일 선전으로 쓰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에 그의 모교생 수십 명이 시위에 나선 것이다. 그가 보여준 영상을 보니 그들은 교류단을 맞아 '대만은 중국 타이페이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또한 홍콩혁명 해방이 적힌 플랭카드와 홍콩의 민주화 운동가를 석방하라는 문구가 보였다. 또 시위대는 교류단과 민주적 교류를 하길 희망한다며 홍콩항쟁에 관한 책도 기념품으로 준비해 놓았다.
플래카드에 '민주주의는 무죄' 라는 문구도 함께 있었는데 얼마 전 홍콩 민주화 운동가 45명이 4~10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한 언급이었다. 기소된 것이 벌써 4년 전인데 이제야 결과가 났다니 놀라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상징하는 설산사자기를 강제로 내리고, 홍콩 투쟁의 슬로건인 '빛의 시간光時'이 써져 있는 플랭카드를 몸으로 막았다.
우리는 그날 저녁을 먹으며 대만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대만에 대한 애정이 매우 큰 그가 나 때문에 대만을 떠나오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걱정이었었다고 말했다. 나는 늘 내가 한국을 떠나는 게 그가 대만을 떠나오는 것보다 미련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그는 만약 대만이 안전하고 미래가 있는 나라라면 우리가 함께할 곳으로 대만을 택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나를 대만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홍콩의 반환도 아직 30년이 안 됐다며 장기적으로 20년, 30년 뒤를 보면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그래도 한국은 대만보다는 미래가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나라는 과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올만한 나라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우리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뉴스로 보게 되었다.
루로우판滷肉飯
대만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돼지고기 덮밥이다. 삼겹살을 작은 조각으로 잘라 볶은 뒤 양파와 간장양념을 넣고 40분 이상 오래 끓여 졸인다. 오래 끓일수록 삼겹살이 입에서 연하게 부서진다. 원래는 두부와 계란도 넣고 같이 졸인다. 오이무침이나 청경채를 곁들여서 먹는다.
예전에 대만에서 음식이 풍족하지 않던 시기에는 통으로 된 삼겹살은 너무 비싸 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투리로 남은 고기를 싸게 사거나 공짜로 주는 뭉개진 고기들을 받아와 간장에 조려 만든 음식이 루로우판이다. 그래서 고기 조각이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