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명사) 뇌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실내에서 느끼는 양막과도 같은 평온함.
어원 라틴어 chrysalis(나비의 번데기)
그런 사람 있지. 유독 비 오는 날 가만히 앉아 웃음 짓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그저 날씨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계절과 날씨를 좋아하지만,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건 좋아함보다는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 편안하기 때문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조금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그런 감정.
나비의 번데기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된 크리설리즘.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껍질 속에서 완전히 변태하길 기다리는 번데기. 비가 오면 세상은 한층 조용해진다. 습기 어린 공기는 무거워지고 축축한 말은 느릿해진다. 모든 것을 내려앉게 했던 비가 그치면 세상이 밝아지고 풀잎은 반짝인다. 무겁게 웅실거리던 물기는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가벼워진 세상은 다시 찾아올 먹구름을 피해 도망친다. 비는 똑같이 다시 내릴 텐데.
번개가 인사하면 곧 천둥이 다가온다. 속도가 다른 빛과 소리가 부조화를 일으켜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건 과학이기 때문이고, 눈을 간지럽히고 몸을 진동시키는 뇌우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건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이 현상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그저 취향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 몸이 콘크리트 건물을 양막이라고 느끼는 것일까.
모든 생물은 뇌우가 내리치면 지독한 우울에 시달린다. 대기 중 기압이 감소해 신체에 공급되는 산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울에 빠진 뇌는 몸을 잔뜩 부풀려 의기양양하게 선택을 시킨다. 합리적이란 착각에 빠져 더욱이 멍청한 선택을. 자고 일어나면 해소될 작은 감정에게 주도권을 쥐어 준다.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지만 우울과 맞대 앉는 방법은 안다. 우울을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하단 걸 명심하자. 받아들이지 못한 필연은 불행이 되니까. 그러나 거리를 둘 순 있다. 지나가는 소나기일 뿐이니 비가 그치면 물러나도록.
모든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언젠가 지워지고, 잊혀지고, 변형됐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란 걸 새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