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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Nov 29. 2024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DAY3-2

우리가 간 해변은 가볍게 물놀이를 즐기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온화한 기후, 발바닥에 닿는 부드럽고 푹신한 모래밭, 어린이들도 용기있게 뛰어들 수 있게 눈높이를 맞춰서 놀아주는 파도까지.

탁트인 바다를 보니 내 마음도 촤르륵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른들은 바다에 오가기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깔았고, 어린이들은 돗자리가 깔리자마자 입고 온 옷을 벗어던지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낸시는 바닷물이 닿을랑말랑 하는 곳에 서서 아이들이 물 속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도록 살폈다. 나는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며 아이들을 뒤따랐다.

아이들은 자기가 타려고 점찍어둔 파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체 줄넘기를 할 때 폴짝 뛸 타이밍을 기다리듯 파도와 부딪칠 순간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바라보는 눈빛들이 카메라 화면에 들어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 그리고 촬영하다가 아이폰이 물에 빠질까 걱정하는 나까지, 이렇게 셋이 모이니 과거의 어떤 여름날이 떠올랐다. 예전에 나는 한 대안학교의 연례행사인 도보여행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DMZ에서 출발해서 강릉 경포해수욕장에서 끝나는 5박 6일의 여정이었다. 마지막 날, 종착지에 미리 와있던 양육자들이 그 동안 수고했던 아이들을 박수와 환호성과 포옹으로 맞이하는 것이 매년 이어지는 도보여행의 피날레였다.

저 멀리 바다가 언뜻언뜻 보일 때부터 일행을 둘러싼 공기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는 뿌듯함, 바다를 본다는 설렘 등이 뒤섞여 부스터가 되었는지 아이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모래밭에서 가족들과 부둥켜 안았을 땐 여기에 사랑, 반가움, 대견함 같은 감정들도 더해졌다. 저 멀리까지 넓게 펼쳐진 바다는 이 좋은 기분을 널리 퍼뜨려주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내가 찍고 있는 사람들의 기분이 나에게도 전달되어 액정화면 속 얼굴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뻤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잡혀 바닷물로 던져지는 선생님들을 찍는 것은 전혀 기쁘지 않았지… 후후후

얘들아! 이 카메라 비싼 거야! 이 렌즈도 비싼 거라구! 이거 물에 빠져서 고장나면 그동안 너희 찍었던 거 다 날아가!

라고 카메라를 애들 눈앞에 들이대며 다급하게 외친 덕분에 나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는 바닷가의 추억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저장돼 있는 곳들도 있다.

먼저 해운대. 

해운대는 예전에 한 두달 씩 부산출장 다니던 시절에 친숙해졌다. 생각해보니 바닷물에 들어가 본 적은 없네? 나한테는 산책로로서의 역할이 더 커서 달맞이고개부터 동백섬까지 바다를 옆에 두고 걷거나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겠다. 한여름 휴가철 새벽 또는 아침에는 해운대 해변을 따라 달리는 조깅은 기대만큼 상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젯밤 또는 오늘 해뜨기기 전까지 사람들이 길바닥에 흘리거나 버린 술냄새가 불쑥불쑥 콧구멍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웩거리다가 호흡이 엉킬 수도 있으니 조심. 


그 다음은 동막해수욕장.

해수욕장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푸른 바다와 노란 모래밭의 조합은 이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코를 찌르는 물비린내, 질퍽이는 갯벌이 있다. 그리고 갈매기, 갈매기, 또 갈매기. 

이곳에 가면 걸어다니는 갈매기, 관광객의 정수리 주변을 맴돌며 나는 갈매기 등등 수많은 갈매기들이 모여있는 그림에 압도된다.

그 중 제일은 인간의 손에 어떠한 부상도 입히지 않고 정교한 비행솜씨를 뽐내며 깔끔하게 새우깡만 물어채서 멀어지는 갈매기이다. 이 곳 갈매기들은 주황색 봉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어떤 인간이 봉지를 뜯는 모습을 포착하면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새들이 순식간에 그 사람 머리위로 몰려든다.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 인물들의 공포를 직접 체험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새>를 떠올리며 아, 그 영화 속 해변에 새우깡 파는 가게만 있었어도 피해가 덜했을 텐데 라며 안타까워 했지.


마지막으로는 을왕리 해수욕장.

어디보자, 거긴 어떤 풍경이었더라.

해가 떠있어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때 거길 가본적이 없네?

작은 기억 조각이라도 있을까 머릿속을 파헤쳐도 나오는 것은 밤풍경뿐이다. 밤바다도 아님. 피융 피융 경박한 효과음과 함께 발사되는 폭죽, 그리고 매캐한 연기와 냄새를 피우는 조개구이. 바닷가에 갔지만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뭐하러 갔었니 너. 허허허 실소만 나올 뿐이다.  


우리가 간 해변은 가볍게 물놀이를 즐기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온화한 기후, 발바닥에 닿는 부드럽고 푹신한 모래밭, 어린이들도 용기있게 뛰어들 수 있게 눈높이를 맞춰서 놀아주는 파도까지.

그러나 폭죽이 사그라진 뒤에도 한참 올려다 보던 밤하늘, 초고추장과 치즈 범벅에 가려져 원래 맛을 알 수 없던 조개, 수면 위로 일렁이는 달빛이 있던 바다도 참 좋았단다.

그렇지 엄마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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