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1
유진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낸시의 남편 데이빗은 유진이네를 공항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드디어 그 ‘인앤아웃’ 햄버거를 먹고, 라크마(LACMA)라는 미술관에 갔다가, 한인타운에 있는 반찬가게에 들릴 거라고 낸시가 말해 주었다.
인앤아웃.
먹어 본 사람들은 모두가 칭송하는 그 버거. 국내에서는 삼 사 년에 한 번씩 아주 잠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가 랩업(wrap up, 마무리한다)하는 햄버거가게. 한국 상표권에는 상표를 등록했더라도 삼 년 이상 상표를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에 인앤아웃은 상표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왔다간다. 한국에도 인앤아웃이 있는지, 먹어봤는지 데이빗이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런 영업방식이 흥미로웠는지 데이빗은 그럼 그 팝업스토어는 어디에 생기는지도 궁금해했다.
트렌드에 관심이 많거나 미국생활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은 ‘강남’에 주로 열린다고 말해주었다. 요즘이라면 각종 팝업스토어가 몰려있는 성수겠지만.
나도 햄버거를 좋아하고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했기에 먹어보고는 싶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줄서기를 감내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햄버거는 기대한 만큼 맛있었다. 그러나 햄버거보다 더 맛있었던 건 후렌치후라이였다. 진짜 감자맛이 났다. 감자음식에서 감자맛이 나는 게 당연한데, 어찌 ‘진짜 감자’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갓 찐 감자맛이 나서 감자라 생각한 건데요.
갓 찐 감자맛이 났다고요.
데이빗에게 말했더니 여긴 냉동감자를 쓰지 않고 생감자를 튀겨서 그렇다고 했다. 밀크쉐이크가 너무 되직해서 빨아들이려면 볼이 홀쪽해지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던 것 빼곤 다 좋았다.
LACMA는 미리 이 곳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간 게 아쉬움으로 남는 유일한 곳이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는 온라인 뉴스에서 여러 유명인들이 ‘LACMA ART+FILM’라는 예술 후원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엥? 내가 갔다 온 라크마가 이런 곳이었어? 영화랑도 관련이 있는 곳이었나? 하고 나는 다녀온지 거의 4개월이 지나서야 LACMA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다.
물론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갔었을 때에도 좋았다. 피카소의 작품도 여럿 걸려있었고, 아마도 르네 마그리트의 제일 유명한 작품일, 대놓고 파이프를 그려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패기있게 써놓은 파이프 그림도 있었다. 이 곳에 있는 그림만으로도 미술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각각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내가 원래 그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율이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그림그리기를 좋아한다 해도 이제 아홉 살이니 대부분 모르고, 어떤 건 이상하게 그렸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지.
그렇다고 내가 도슨트를 자처해서 피카소 그림 앞에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파블로 피카소라는 화가인데, 입체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어. 너도 들어봤지 피카소. 입체파란 뭐냐면, 여기 사람 얼굴이 보이지? 그런데 선율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얼굴이랑 다르게 그렸지? 근데 여기 봐봐라 선율아. 이게 눈인 건 알아보겠지. 근데 눈을 앞에서 봤을 때, 옆에서 봤을 때 두 모양이 한번에 그려져 있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물을 한 쪽에서만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을 합쳐놓은 걸 입체주의라고 해’
라고 설명하는 건 상상만 해도 듣는 선율이나 말하는 나나 피곤한 일이었다. 실제로 선율이는 내가 어떤 원리나 단어의 뜻을 말해줄라치면 바로 낌새를 알아채곤 ‘설명하지마, 설명하려고 그러는 거지, 설명 안해도 돼’라며 안들려요 표정을 짓기도 하니까.
아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LACMA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내가 갔던 전시관 말고 또 어떤 곳이 있나 살펴보기 위해 캠퍼스맵 탭을 클릭했다. 지도 이미지 위에는 ‘이 지도는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로 제작되어 있다’는 안내가 적혀있었다. 캘리포니아에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병기되어 있던 곳이 많았던 게 기억이 남아서 앞의 두 언어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미서부에 한국 출신 인구가 많아서 한국어도 넣었나 하고 맨 아래까지 스크롤을 내려서 한국어로 작성된 지도를 보았다.
그러나 지도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지도 아래 작게 쓰여진 한 문장이었다.
이 안내서는 배우 송혜교(Song Hye-kyo)와 서경덕(Seo Kyoung-duk) 교수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아, 이게 그거였구나. 일 년 전엔가 언뜻 봤던 기사가 머릿 속에서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해외 여러 곳에 한국어 안내서를 기증해온 이 두 사람이 미국의 여러 유명 박물관, 미술관에도 안내서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LACMA도 그 중 한 곳이었던 것이다.
아아,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마음씨도 예쁜가요.
잠시 송혜교님에게 감사하고 감동하는 시간을 가진 후 지도를 훑어봤다.
‘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 이라는 건물명이 눈에 띠었다. 검색해보니 나와 선율이 둘다 미술관에서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돌아다녔을 전시관이었다. 아카데미상 수상작들에 대한 설명, 라라랜드에서 정말 예뻤던 노란 드레스, 스타워즈 촬영장을 재현해 놓은 공간, 그리고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메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영화 대부의 원작 책까지. 코를 박고 들여다볼 전시품들이 엄청 많았다.
그 때 LACMA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이 영화박물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더라면 이 곳에 가자고 했을 텐데. 아마도 난 내가 사랑한 영화들에 대해 목이 쉬도록 떠들어 댔을 거야. 선율이에게는 한국어로, 낸시네 가족에게는 짧은 영어실력으로 어떻게든. 그럼 선율이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함께 사랑할 수 있게 됐을지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이 문장에 담겨 있는 모든 단계를 거쳐본 사람은 안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대했던 무언가에서 예전과 다른 매력을 발견했을 때의 설렘이 이 말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로 인해 무언가를 사랑하고, 알게되고, 전과 다르게 보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과정을 보고싶다. 그럼 그 사람도 나처럼 저말을 좋아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