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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Nov 28. 2024

냅킨 반 장과 아들의 연애편지

DAY3-1

오늘, 다같이 해변으로 놀러가기로 하지 않았나?

거실로 나가니 뒤뜰의 수영장과 정원을 청소하고 있는 유진이 창밖으로 보였다. 부지런한 유진이는 진작부터 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침부터 저렇게 힘뺐는데 바로 다음 스케줄을 소화한다고? 헤더 말로는 해변에서 돌아 온 후에도 집수리 업체와 약속이 잡혀 있다고 했다. 

LA에서 다섯 시간 걸리는 워싱턴에 살고 있기에 유진이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수리가 급한 몇 군데를 해결할 모양이었다. 수리 목록에는 보일러 교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집을 지을 때 설치한 후로 무려 삼십 년만에 처음으로 손보는 것이라고 했다. 고모가 80년대에 보내셨던 고모집 사진을 보고 나는 ‘와, 정말 미국집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있는 집이니까, 당연히 미국집이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백투더퓨처나 이티 같은 80년대 영화에서 나오는 집.

주택가의 인도에서 그 집의 현관까지 길이 이어져 있다. 그 길 양쪽으로는 전체적으론 소박하면서도, 군데군데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앞뜰이 있다. 현관이 있는 거주공간 옆에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차고가 붙어있다. 집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뒷마당에는 수영장과 아담한 정원이 자리잡고 있는, 미국 영화 속 미국집. 그러나 지금은 집도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제 기능을 잃었다.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니 수영장에는 물 대신 낙엽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뒤뜰에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는 고무부가 돌아가신 후론 관리할 사람이 없어 가지가 멋대로 뻗어있었고, 덩굴은 담을 타고 옆집까지 넘어갔다. 고모는 고모부가 직접 심을 나무를 남기고 싶어하셨지만, 베어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백투더퓨처처럼 활기넘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속 여기저기 물이 새기 시작하는 주인공 부모님의 식료품 가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폐업을 앞둔 오래된 세탁소 처럼 빛이 바랬다. 나는 저 두 영화를 보면서 계속 마음이 심란했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즈음에 내가 전해들은 고모의 상황과 비슷했다.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교포1세대가 물러나고 2세대가 중심이 되는 바뀌는 시기로 접어들었구나 생각했다.


낸시와 일라이자가 도착하고 유진은 청소를 마무리했다. 집을 나서기 전 낸시와 나는 점심식사를 하시는 고모 옆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고모는 낸시에게 냅킨 한 장을 달라고 하셨다.

낸시는 냅킨을 건네며

“엄마, 엄마 옛날에 맨날 냅킨 아껴쓰라고 반 장씩 찢어쓰라고 했었잖아.” 라고 말했다.

“그 땐 그랬지, 뭐든 아껴야 했으니까.”


대략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분들의 생활방식은 둘 중 하나다.

아껴쓰거나, 안버리거나.

이 둘 외의 다른 선택지는 그들의 머릿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나의 아빠는 모든 물건을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바라보았다. 남들 눈엔 고철이거나 쓰레기이지만, 아빠의 시선에서는 자세히 보면 아직 쓸만하고, 오래 보면 어딘가 쓸 데가 있을 듯 했다. 모든 물건에서 쓸모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아빠는 장르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족족 모았다.  


작년 공항에서 아빠는 선율이에게 봉투를 주며

“엄마 우울할 때 이걸로 엄마랑 맛있는 거 사먹어”라고 말씀하시고 출국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셨다.

아, 말로 표현은 안하셨지만 아빠는 내 상태를 알고 있었구나. 아빠의 마음씀씀이에 울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언가 내 신경을 거슬리는 게 나타나 따뜻한 사랑으로 부풀었던 나의 마음을 한 순간에 터뜨렸다. 

누구야! 이 부성애를 느끼는 흔치 않은 순간을 방해하는 게 누구야! 당장 나와!

선율이의 손에 쥐어있는 장밋빛 봉투가 빼꼼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선율이에게 준 돈봉투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흰색의 규격봉투가 아니었다. 크기도 애매했고, 봉투 앞면에는 귀여운 곰돌이가 I love you 라고 말하는 말풍선도 그려져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엄마나 아빠나 저런 귀염뽀짝한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아빠가 나를 정말 사랑해서 직접 문방구까지 가서 저런 봉투를 산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나? 아님 나이가 드셔서 바뀐 건가’

그 땐 이미 아빠가 출국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후라서, 답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남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야, 근데 아빠가 선율이 용돈을 주는데 빨간 봉투에 넣어줬어. 거기에 하트도 그려져 있었어”

라고 속닥거리니 남동생이

“거기에 아이러브유 라고 써있디?” 물었다.

엉!

“그거 내가 옛날에 쓰고 남은 건데 아빠가 또 아빠서랍에 넣어놨나봐. 껄껄껄”

그렇다. 아빠는 아들이 못 다 쓴 연애편지봉투도 곱게 간직했던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선율이한테 줄 용돈도 챙기다가 그냥 지갑에서 꺼내주는 것보다 여기에 넣어 주는 게 모양이 좋겠지 하고 편지봉투를 꺼내며 역시 버리지 않길 잘했다고 뿌듯해하셨을 것이다.

덕분에 아빠 생전에 본가는 황학동 벼룩시장 인테리어를 벗어나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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