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까맣고 좁은 터널에 깊은 공포감을 느껴도 그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이유는 끝에 있는 출구의 빛과 바람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이 보이는 터널은 입구에서 부터 나의 온 정신과 몸을 감싸는 터널의 위압감에 둘러쌓이게 되어도 출구에서 불어오는 온도가 다른 공기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눈에 명확히 보이는 빛으로 인해 발걸음을 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내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죽음을 부를지 고통을 줄지 어떻게 알고.
명확하게 출구에 보이는 풍경이 나무잎이 하늘거리는 도심속 숲같은 곳인지 모를때는 두려움이 앞선다. 심지어 보이지 않으면 더 두려울 뿐, 그러나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내 눈앞에 보이는 명확한 풍경도 내가 그 풍경 속 그림처럼 그 장면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고작 터널 입구에서 보눈 풍경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명확하게 결정되어있다는 눈앞의 풍경만을 믿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아가지 않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에 나아가자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두려움이 나를 살릴때도 분명 있고, 그것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맨몸의 나 그자체를 지킬 유일한 수단이자 또 다른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직접 경험할 용기로
나의 미래가 불확실 하다는 이유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절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명확히 보이는 풍경에 담겨보지 않았으면서 그 풍경을 단정지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미래는 그런 것이다. 알든 모르든 무조건 내 앞에 놓인 터널이다. 두려움에 정체되어 있어도 괜찮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될 뿐이다. 내일의 나에게 오늘은 어제의 터널이거나 어제 지나지 못햇던 터널 앞에 서 있는 어제이자 오늘의 나일 뿐이다.
미래에 잡아먹히고 움츠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은 오늘의 나의 선택과 발걸음으로 터널울 뚫을 뿐이다. 그 한치의 오차로 낭떨어지에 다가간다 한 들, 그것은 낭떨어지에 떨어졌던 과거의 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오늘을 산다. 미래에 잡혀 오늘의 나를 아껴주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내일의 내가 내일마주할 그 터널 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스스로를 안아주자고 결심한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