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도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르다. 나는 씨가 없는 납작하고 잘 마른 쫀득한 곶감과 씨가 있고 속은 좀 부드러운 덜 마른 그런 곶감을 좋아헀다. 기본적으로 달고 맛있는 감으로 만든 곶감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고 본다. 그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면, 드라마에서 보던 꽃선비들의 갓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예쁜 장식같기도 하고, 운동회 때 귀여운 머리를 하려고 손가락 한마디마다 머리를 뭉쳐 묶어 내렸던 아이들도 생각이 나고는 했다.
나는 주황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곶감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곶감은 시골집에 살았던 적에는 가을의 증거이기도 했지만, 도심으로 오고 나서부터는 추석 명절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이기도 했다. 명절 선물로 곶감이 꼭 빠지지 않고 오다 보니, 기성품으로 만들어진 도심의 맛을 느끼기에 좋았던 것 같다. 이 명절 곶감은 어릴 때는 예민하게 느꼈던 감의 텁쓸한 맛을 점차 잊게 해 주었는데 덕분에 이제는 감을 좋아하게 되어 생과일의 상태로도 곶감의 상태로도 잘 먹는다. 다만, 홍시는 아직도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걸 보아하니, 캐러멜을 좋아하지 않는 맥락과 비슷한 듯싶다.
시골 살 때는 길가에 열린 은행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매실나무, 밤나무, 도토리나무 등 이런 것들이 누구의 소유하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밤 몇 개를 주워다가 통통하게 이쁜 밤은 만지는 느낌이 좋아 주머니에 몇 개 넣어오고, 내 키만큼 고개 숙인 대추나무 잘 익은 것을 하나 따서 슥슥 옷에 닦아 배어 물곤 했다. 그때는 말린 대추가 이 대추인 줄도 몰랐다. 생대추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랫집 밖에 매실나무 아래에는 그 큰 나무 덩치만큼이나 사람 발 디디면 바삭 밟히는 매실덕에 매실청과 매실수를 잔뜩 담그곤 했었고 끝이 시옷 모양의 기다란 나무를 어디서 구해온 아빠가 집 앞 밭 뒤에 감 따러 갔다가 구경 나온 옆집 할머니도 몇 개 따드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집 소쿠리에는 커다란 홍시가 몇 개나 담을 수 있게 되고, 마당 그늘진 곳에 잠시 두면 게 중에 조금 터진 곳에는 파리들이나 벌들이 얼쩡거리고는 했다.
엄마는 그렇게 따온 감 중에 몇 개를 골라 껍질을 다 까고 대나무 소쿠리에 두고 말렸다.
우리 집은 옆집처럼 주렁주렁 곶감을 다는 게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그냥 대충 환기 잘 되는 그늘진 곳에 감을 말렸었다. 그러니 나는 바싹 말린 곶감보다 덜 말린 곶감이 좋았다. 엄마가 만드는 곶감은 대게 우리가 생각하는 곶감보다 바싹 마르고, 집 앞에서 대충 따온 감으로 만들어 맛이 없었다.
어린 나로서, 농약과 비료 없이 커다랗게 자란 오랜 나무의 감과 그 감으로 만든 곶감, 요즘홍시보다 물맛이 많이 나는 홍시는 맛이 있었을 리 없었다.
앵두도 집에 심어놓은 나무에서 따다 먹고, 해바라기도 내가 직접 심어난 해바라기를 먹었다. 옥수수도 밭 옆에 심어놓은 것들 따다가 어깨 빠지게 껍질 벗기고 수염 뜯고 잘라내서 쪄먹었으니 도심에 와 먹은 초당옥수수와 상품으로 판매하는 감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때의 풍경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어지고 오로지 이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꺼내올 수밖에 없어서인지 그때의 밍밍한 홍시와 아빠에게 속아 잘못 먹은 떫은 감, 앞집 할머니랑 다르게 소쿠리에 말리던 곶감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그러니 추석 선물로 오는 곶감의 존재가 너무 고마울 수밖에.
꼭 언젠가 옆에 밭이 크게 딸린 전원주택을 사서 감나무, 대추나무, 매실나무를 심고 싶다. 홍시만큼 익어 떨어진 감을 밟으면 무조건 신발은 홍시폭탄을 맞고 내 발에도 찐득하게 스며든 홍시를 찬 수돗물로 씻어내야 하는 짜증은 이제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떨어진 단 홍시에 달려든 수많은 벌레떼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곶감 하나로 이렇게 잃어버린, 사라진 나의 고향을 그리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