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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Oct 09. 2024

Fin. 너와 손쉽게 멀어지는 법

영원하지 못할 안녕을 고하며

안녕.


거진 2주 만에 네게 보내는 글을 쓴다.

14일씩이나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된 걸 보면 널 보낸 내가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나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글이 네게 보낼 마지막 이야기가 될 걸 알아서 한참을 미루고 미룬 걸 보면, 마냥 괜찮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별 후 괜찮음"에 대한 정의를 좀 조정했어. 사람들은 흔히들 그러잖아? "잊어라.", "다른 사람 만나면 잊힐 거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다들 "잊는다"에 초점을 맞추길래 이별의 종착지는 망각으로 생각을 해버렸지 뭐야. 근데, 널 천천히 떼어내며 느낀 건 이별의 완성은 망각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어.


이별의 완성은, 더 이상 널 떠올렸을 때 내가 아프지 않은 거였더라. 어제도, 오늘도 하루종일 네 생각이 드문드문 났고,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에도 나는 너를 그리겠지만, 그러한 사고들이 날 찌르지 않는 것, 날 괴롭히지 않는 것. 조금은 씁쓸해도 미소 지으며 널 회상할 수 있는 것. 너와 함께 듣던 노래의 재생 버튼을 두려움 없이 누를 수 있는 것. 이게 잠 못 이루던 나의 수많은 밤들이 내려준 답인 것 같아.


오늘은 드디어 베개를 빨았어. 더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랑 헤어지고 침구 빨래 같은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뭐야. 하얀 베개가 매일 밤 눈물짓는 통에 사방이 누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탁을 못 했어. 오늘은 드디어 베개를 빨았네. 널 보내지 못해 흘리던 눈물들이 같이 씻겨져 내려갔을 생각을 하니 꽤 속이 시원하더라.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


이젠 내 인생에 너라는 사람이 존재했던 게 정말 현실이 맞았는지도 가물가물해지는 나날들이야. 사랑이란, 연애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웃기다.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어떤 사람을 자기 삶에서 빼낼 수 있는 걸까? 나랑 친한 언니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자기 인생에서 너란 사람 통째로 지워 버린 사람 뭐가 좋다고 자꾸 그리워하냐"라며, 걱정 어린 질책을 건넸어. 근데 있잖아, 대외적으로 봤을 땐 내 인생에서도 너는 이미 도려져 나갔다? 너도 그렇길. 이렇게 겉으로 보이기엔 내가 네 인생에 더 이상 없더라도, 한 번씩 그리워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길,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네게 소원하는 바야.


넌 내가 보낸 생일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지. 못 본 건지, 안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그 메일을 보내는 순간 드디어 내가 너와 이별할 수 있음을 느꼈어. 꼭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진짜 매듭을 지을 수 있겠구나- 하고, 이미 서버를 타고 날아간 메일을 보며 많은 것들이 지나가더라.


모두와 친하지만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던 나에게, 사람은 못 해도 반년은 보고 친해져야 한단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그 모든 경계를 풀고 들어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둔 너, 내가 못나게도 미루고 미루던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 주고, 참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못나고, 후질 때 곁에 머물렀던 너, 진짜 많이 고맙고, 너무 많이 미안했어.


네 덕에 오늘을 열심히 살아. 올해는 이렇게, 애도 기간이자 널 놓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좀 더 갈고닦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 그렇게 살아낸 뒤 맞이하는 겨울은 참, 시원할 것 같아.


감히 바라건대, 너에게도 나와의 이별이 조금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길. 혹시, 우리가 혹시라도 우연이 닿아 지나가다 마주치는 날이 있다면, 갑작스레 날 마주한 너의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릴 수 있길. 내가 너에게 좋은 기억이었길. 너도 내게 배워간 게 있길. 서로의 삶이 분리되어 버린 너와 내가, 더 멋있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기도해.


이게 내가 너와 손쉽게 멀어지는 길이야. 멀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다른 관점에 답이 있었네. 갑자기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네 생각이 나고, 맛있는 음식 한 입에 네 생각이 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랑 멀어질 수 있는 거였어. 멍청하게도, 깨닫는 데에 참 오래 걸렸다.


너는 우리가 헤어지는 날 내게 안녕을 고했지만, 난 그날로부터 4개월이 지난 이제서야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그때 네게 말했던 "안녕, 잘 지내" 따위의 말들은, 그저 너무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척"일 뿐이었거든.


이제 진짜 내 마음을 고해.

MS야, 너무 고마웠고, 정말 미안했고, 많이 그리웠어.

앞으로도 난 네가 종종 그리울 거고, 꽤 자주 생각날 거야. 그렇지만 더 이상 나의 회상이 나 자신을 괴롭히도록 두진 않을게.


누가 뭐래도 넌 내게 참 좋은 사람이었고, 덕분에 참 많이 배웠어. 고마웠어. 진짜로, 잘 지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풀리지 않는 일들에 너무 맘 상해하지 말고,

원하던 일들도 다 이루어 내고,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그랬으면 좋겠다.


진짜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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