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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20. 2024

잘못된 이별의 전제

잊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틀렸다

내가 네게 배워야 했던 건 잊는 법이 아니라, 마음에 빗장을 거는 방법이었나봐. 내가 널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네가 너무 그리워 당장이라도 넘어지고 싶건, 일어서고 싶건,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다 마음속에 꽁꽁 걸어 잠근 채, 오늘의 나를 알차고 당차게 살아가는 방법. 그게 날 떠난 널 보내며 내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새로운 개념인 것 같아.



있잖아. 오늘은 일이 너무 하기 싫은 날이었어. 모처럼 카페 근무는 쉬는 날이라 원고를 두 건이나 작성해야 했는데, 아직 한 건도 끝마치지 못한 거 있지. 그래서 한량처럼 노래를 튼 채 "아, 하기 싫다-"는 말만을 읊조리며 방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문득 네가 이 모습을 봤으면, 아직 날 사랑하는 상태인 네가 이 모습을 봤으면 웃음을 터뜨렸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내가 미쳤지, 또 시작이라며 자책 어린 실소를 머금은 채 방바닥에 드러누웠는데, 멍든 팔이 보이더라. 근데, 왜인지 꼭 네가 어디서 멍들었냐고 물어봐 줄 것만 같은 거야. 일하다 부딪혔다는 대답에 다치지 말고 일하라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해 주는 네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더라고.


오늘도 널 잊는 데에 실패한 날, 아니, 오히려 더 상기시켜 버린 날 자책하려다가 멈칫, 작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라.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몇 반 몇 번이었는지도 기억하는데, 담임 선생님 이름,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얼굴까지, 좀 친했던 급우들 생일 날짜까지 다 생생히 기억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내 인생에 참으로,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널 잊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진짜, 오만한 다짐이었던 거잖아. 내가 널 잊겠다고 다짐한 것 자체가. 감히, 내가 감히 널 잊어버리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전부 다. 전부 다 잘못되고 오만한 전제였던 거였어.


어른이 되는 과정은 참으로 험난한 것 같아. 결국, 앞으로 영영 품고만 가게 될 소중했던 순간과 기억들을 마음 저편에 전부 담아둔 채 오늘을 살아가는 거잖아. 잊을 수 없는 걸 잊겠다고 애쓰고, 잊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나를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게 가능하단 전제 자체가 틀렸던 거였어. 잊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였어. 이렇게 단순한 걸, 무려 3개월 하고도 10일이 지나서야 깨닫다니.


물론, 그렇다 해서 널 가슴 저편으로 묻으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진 않을게. 어떻게든 기억이 덜 나게, 내 삶, 내 하루의 전반을 네가 차지하진 않도록 매일의 최선을 다할 거야. 그렇지만, 이젠 자꾸만 널 추억하고, 자꾸만 네가 아직도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 자신을 너무 혐오하진 말아야겠다.


있잖아. 이젠 내가 그리워하는 게 너라는 사람인지, 아니면 널 좋아했던 나 자신인지, 아님 네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붙들고 있는 건지, 도대체 어떤 감정이 매일의 나를 이리도 무섭게 덮치는지 잘 구분이 안 가. 내가 널 사랑했다 말하기엔 감히 내가 그럴 만한 그릇이 못 되는 인간이고,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대기엔 참으로 생경한 경험이라 정체를 구분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말이야, 그냥, 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채 보편적인 언어로 네게 하고픈 말을 전해본다면, 참 미안해, 미안하고, 여전히 좋아하고, 여전히 고맙고, 어쩌면 여전히 사랑하고, 그래서 또 미안해.


내가 네게 배워야 했던 건 잊는 법이 아니라, 마음에 빗장을 거는 방법이었나봐. 


내가 널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네가 너무 그리워 당장이라도 넘어지고 싶건, 일어서고 싶건,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다 마음속에 꽁꽁 걸어 잠근 채, 오늘의 나를 알차고 당차게 살아가는 방법.


그게 날 떠난 널 보내며 내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새로운 개념인 것 같아.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열심히 배울게. 열심히 발전하고, 또 새롭게 매일을 살아갈 거야.

잊으려고 해서 미안해. 기억할게. 기억이 바래지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기억할 테니, 제발 날 떠나 주길. 네가 아니라 내가, 널 떠나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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