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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19. 2024

우리의 연애가 좋아함이 아닌 사랑이었으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까?

넌 내게 쉬운 사랑을 가르쳐 줬어. 옆자리에 있단 가벼운 자격만으로도 사랑한단 말을 들을 수 있는 권리를 줬어. 그 쉬운 사랑을 사랑한 죗값은 내가 치르나 보다. 사랑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 대가를 내가 치르는 거야. 작은 장벽 하나도 극복하지 못한 마음을 감히 사랑이라 칭해서, 정말 미안해.



헤어진지 3개월이 다 돼서야, 너랑 한 전화 통화를 다시 들었어. 들어봐야지, 한 번은 다시 복기해야지, 수없이 다짐했었는데 차마 재생 버튼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더라. 내가 너랑 하는 통화를 언제부터 녹음하기 시작했는지 알아? 우리가 헤어지기 두 달 전부터야. 왜 녹음하기 시작했는지 알아? 내가 너를 놓아줘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젠간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 내가 널 놓아주는 게 더 맞는 판단인 날이 조만간 올 것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나 혼자서라도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을 것 같아서 그랬어. 


그마저도 맨정신으로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요즘 들어 자꾸 늘고 있는, 혼자 술 마시는 시간을 좀 빌렸어. 우리가 헤어지는 날 마지막으로 한 전화를 들었는데, 그 때에도 넌 날 밝게 부르며 전화를 시작하더라. 그게 참 고맙고 미안했어. 근데 너무 좋았어. 네 목소리가 들려서. 


내가 이 전화를 다시 못 들었던 제일 큰 이유는, 이별의 아픔이 아니야. 네게 너무나도 미숙하게 대하는 내 자신을 보기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그랬어.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어떻게든 아닌 척, 모른 척, 그렇게 돌아가면서만 답하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그 상황을 그렇게밖에 대처하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랬어. 내가 과거의 나 자신을 너무 혐오할까봐. 너무, 원망할까봐. 너무너무 내가 싫어질까봐.


근데 지금은, 그래도 괜찮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괜찮으니,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수용할 수 있으니, 다 필요없고, 네가 너무 듣고 싶어서 틀었어. 하루종일 사무치게 그리워해도 이제 자꾸 네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그리움도 장작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 같아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듣고 싶어서.


듣는 내내 엄청 울었어. 결국 끝까지 못 들었어. 끝까지 들으면 다시 널 보내는 것 같을 것 같아서. 내가 집 앞에서 너랑 이별하는 통화를 한 게 되게 잘못한 일인 것 같아. 난 집에 들어올 때마다 너랑 헤어지는 나를 봐. 널 차마 놓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몇 분이라도 더 붙잡아 보고자 계속 모르는 척, 빙빙 도는 말만 하면서 놀이터 앞에 주저앉아 있던 나를. 사실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면서 어떻게든 모른 척이라도 해서 널 잡아보고 싶었던 나를. 지금, 그 순간 제발 시간이 멈추길 바랬던 나를.


왜 그렇게 진중하게 얘기해 줬어? 차라리 나쁘게 굴지 그랬어. 제발, 제발, 제발.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거야. 널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붙들고 있지 않았을 거야. 널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나를 이렇게까지 채찍질하지 않았을 거야. 날 이렇게까지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제발. 


차라리 그냥, 단순하게 말하지 그랬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런 연애 하고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헤어지는 말을 하는 순간까지 날 좋아한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한 줄로 긋고 떠났으면, 내가 이렇게 매달리고 있지 않았을 텐데. 제발, 너 같은 거 훌쩍 떠나보내고 어떻게든 잘 살아 보겠다 애쓰고 있을 텐데, 


도저히 더 들을 수가 없었어. 네가 나를 차는 목소리마저 너무 그리운 거야. 단호히 안 된다고, 이게 맞다고 선 긋는 목소리마저 참, 소중한 거야.




"좋아하는데 이런 연애가 어떻게 가능하지?"


"헤어지면 못 보는 거잖아 영영"


"그건 모르는 거지, 근데 내가 생각한 좋아하는 연애는 이런 게 아니야"


"나도 그렇긴 해"


"알면서 나한테 왜 물어보지? 진지하게 말할게. 사랑하는 연애는 이런 게 맞을 수 있어. 근데 좋아하는 연애는 이거랑 너무 달라."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있잖아. 알아들었어. 네가 말을 하기 전부터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었어. 근데, 알아들면서도 다시 되물었어. 알아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이걸 알아들으면 끝나는 거잖아. 마지막까지 상냥한 네가,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말해줄 것만 같아서, 내가 계속 모른 체하면 너를 좀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있잖아,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인 걸 다 알지만 말이야, 나에게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아니면 차라리,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그래서, 이런 고비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상태였다면, 나도 널 사랑하는 상태였다면, 우린 달랐겠지?


네 말이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이제 난 그 경계조차도 만날 수 없지만 말이야, 네 말대로, 네가 날 사랑했었더라면, 지금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지?


있잖아, 나는 널 사랑했었을까? 내가 널 사랑했던 게 맞을까?


내가 너한테 그랬잖아. 연애도 조건이 맞아야 하는 건데, 지금 우린 거리라는 조건이 어긋났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잖아. 꼭 조건도, 국경도 다 극복해야만 사랑인 것처럼 말하잖아. 정말 그런 걸까?


고작 인간의 사랑이, 고작 남녀간의 사랑이 그렇게 거창할 수 있는 걸까?


그런 게 사랑이라면 말이야,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았어. 네 말대로라면, 나는 널 좋아하기만 했어.


근데,

진짜 우습게도,

널 잃은 지금은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나 혼자,

나 혼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이게 단지 이별이 주는 착각일까? 견딜 수 없는 상실이 주는 혼돈일까?


아무리 답을 구해도, 정답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런 거창한 것만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너를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어.


이 사실이 네게 참 미안해.

너무 미안해.

작은 사랑도 사랑이라 해서, 너무 미안해.

작은 장벽 하나도 극복하지 못한 마음을 감히 사랑이라 칭해서, 정말 미안해.


넌 내게 쉬운 사랑을 가르쳐 줬어. 옆자리에 있단 가벼운 자격만으로도 사랑한단 말을 들을 수 있는 권리를 줬어. 그 쉬운 사랑을 사랑한 죗값은 내가 치르나 보다. 사랑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 대가를 내가 치르는 거야.


겨울이 가기 전에,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이 사랑이 끝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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