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 접근, 개인, 집단
지난 편에서는 공간을 중심으로 약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어째서 약한 존재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을까?' 안 그래도 노동시간이 많은 이곳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효율입니다. 시간 연구자 김영선은 『정상 인간』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여유시간을 박탈당한 인간의 모습을 나열합니다.
지하철에서 빠른 걸음으로 달리듯 걷는 사람들, 뛰면서도 스마트폰으로 가장 빠른 환승칸을 찾는 사람들, 느릿느릿 가는 자동차를 보면 숨 막혀하는 사람들, 신호대기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이라도 하면 클랙슨을 울려대는 사람들,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오길 재촉하는 사람들, 자판기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손을 넣고 기다리는 사람들, “지난 세 달에 한 번 쉰 게 고작”이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까지 그 모습들은 수도 없이 많다.
지금까지 제가 줄곧 해온 말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좋은 공간을 만들고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들 바쁩니다. 특히 1부에서는 상념에 잠길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말했죠. 하지만 공원에 간다는 건 그 자체로 여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집 근처에 괜찮은 공원이 없다면 더더욱 '공원에 가서 쉴 시간이 어디 있어?'라는 질문이 떠오를 만합니다. 저도 일할 때는 퇴근하면 녹초가 돼서 당장 집으로 가고 싶은 적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여가’는 ‘일이 없어 남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여가가 덜 중요하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겠죠. 그래서인지 한국은 노동시간이 너무 많아서, 일을 하고(돈을 벌고) 남은 시간에 하고 싶었던 활동을 욱여넣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가를 '알차게' 보내자니 오히려 더 피곤해지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해져서 소득 활동을 더 많이 하게 되기도 합니다. 반면 휴식은 죄책감을 안겨줍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이 심한지라 풍경을 감상할 바에는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시간 외 근무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어딘가에 놀러 가고, 쇼핑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만족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가 시간을 낼 수 있고, 그렇게 시간을 내느라 소진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테레사 뷔커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하루를 꽉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여가 활동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역시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늦은 밤 공원에서 조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안전을 이유로 집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매월 이용료를 내고 체육관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략) 사회 내 어떤 집단이 공공장소에 대한 접근성이 높고, 어떤 집단이 낮은가? 누가 한부모에게 자유로운 저녁 시간을 베풀어주는가?"
열린 공간은 지하철역과 가까울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낮이든, 저녁이든.
평일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공통적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부분 (제가 보기에) 최소 50대 이상인 분들만 보입니다. 더운 날씨에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고, 나무와 그늘을 찾아서 쉬고 대화하는 모습은 당연히 보기 좋죠. 그런데 평일 오후에 느긋하게 걷거나 한적한 장소에 머무르는 건 어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일일까요? 나이가 들고 나서 누려야만 할까요?
유현준 건축가는 많은 사람들이 녹지 산책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로 몇 가지를 꼽습니다. 애초에 접근성이 부족하고(걸어가기에 너무 멀고), 상업시설이 적절히 배치되지 못해서 공간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지적에도 '시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현재 우리의 서울에는 시간 많은 사람이 산책하는 길은 많지만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보행자 도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처럼 야근을 많이 하는 국민도 세상에 없다. 그러니 은퇴하기 전에 누가 여유롭게 이런 산책로를 누릴 수 있겠는가?"
녹색이 많아질수록 아무도 없거나, 특정 연령층만 있거나.
장년층 이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말에만 해가 떠 있는 공원이나 거리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붐빌까 봐 어디 가는 게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모든 직장이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골라서 일할 수 있다면 해결될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실제로 출퇴근 시간이 유연하거나 업무 시간이 불규칙적인 직장 혹은 직종이 있죠).
하지만 '평일 9시 출근 6시 퇴근'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관행인지는 한 번 더 생각해 볼만합니다. 저널리스트 테레사 뷔커는 "시간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며, (중략) 우리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사람의 시간에 포괄적이고 복잡한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합니다. 출퇴근 시간보다 한두 시간 빠르거나 늦게 영업을 하는 경우가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겠네요. 시설(혹은 가게)의 영업시간이 그 지역의 직장인이나 주민 등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유연하게 바뀐 거니까요. 물론 이 사례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저자는 일하는 시간과 자유 시간이 극단적으로 분산되는 상황을 우려합니다.
유연 근무제가 점점 일반화되고 오프 피크 타임(Off-Peak-Time)이 늘어나면서 개개인이 함께 공유하는 사회 공통의 자유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퇴근 시간이나 주말과 같은 집단적 시간 관습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된다. 유연하게 일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은 개인에게는 이점이 될 수 있지만, 그 결과 의지할 수 있는 집단의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친밀한 인간관계와 의지할 수 있는 집단이 각자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만남이 가지는 활력은 소셜미디어로 대체될 수 없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우리 모두 자유롭게 자신의 시간을 쓰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이겠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새벽에는 대부분 장년층만 이용합니다. 저녁이 되면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연령층이 이용합니다. 주말 낮에는 어린아이들도 많습니다(<2-1. 기능>편 마지막 사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