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히거나, 지워지거나
이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공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계단이 있겠죠. 특히 휠체어 이용자는 계단을 의자처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머무르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구석에 마련해 놓은 경사로를 지나가야만 합니다.
공간 설계 과정에서 표준이 되는 비장애인의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겁니다. 휠체어 이용자가 아니더라도 어린이, 노인, 시각장애인, 발달장애인 등 공간에서 약자가 되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심지어 특정 대상을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마저 그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뇌인지과학자 정재승은 복도형 노인 요양시설이 왜 부적절한지 설명해 줍니다.
알츠하이머 치매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은 공간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숙사처럼 생긴 복도형 시설에서는 자신의 방을 찾아 들어가는 것만도 힘든 과제다. 결국 자신의 방도 제대로 못 찾아 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방 밖으로 나가는 행동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은 공간이 인간의 인지와 행동에 주는 영향에 주목합니다.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인간 뇌가 반응하고 행동 역시 이끌어낸다는 것이죠(아직 영향력은 약하지만 신경건축학이라는 학문도 탄생했다고 합니다). 공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리기 위해 낸 책이 『공간혁명』이고, 앞에서 소개한 정재승 교수의 글도 이 책을 환영하면서 쓴 추천사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시설 밖으로 나온 자폐인에게는 어떤 공간이 필요할까요? 자폐스펙트럼장애 전문가 배리 프리전트가 쓴 『독특해도 괜찮아』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비장애인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들의 행동에서 이유를 찾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은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제자리를 빙빙 돌거나, 점프를 하거나, 몸을 흔들며 그런 상태를 일깨운다. 반대로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았을 때는 이곳저곳을 서성이거나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환풍기를 응시하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저자는 자폐증 혹은 감각 처리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치과를 소개해줍니다. 병원을 연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긍정적인 기억을 갖도록 노력했다고 합니다. "병원 내부와 직원들의 모습, 환자들이 받게 될 치료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주중 하루는 오후에 예약 시간을 잡는 대신 진료실을 개방학고 장난감을 갖다 놓았다. 그렇게 해서 환자와 가족들이 재미있게 놀고 병원 직원들과 만나는 시간도 갖게 했다."
일상에서 (특히 바깥에서는) 소음을 비롯한 모든 자극과 변수를 차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거리와 건물을 조성한다는 건, 건축적인 노력을 넘어서 주변 사람들의 존중으로 공간을 채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무리 공공시설이라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따가운 눈빛을 보낸다면 어느 누가 그곳에 가고 싶을까요?
시끄러워도 좋다고 말해주는 도서관입니다. 발달장애인에게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다만 이곳에서만 지역주민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죠. 저는 모든 도서관이 시끄러워도 괜찮길 바랍니다.
객석이 계단형으로 되어 있는 야외무대입니다. 이곳에서는 휠체어도 다양한 높이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동적인 순간과 정적인 순간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특정한 건물이나 부지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로 넓혀서 말이죠. 동적인 순간 중에서도 보행은 어떨까요? 천천히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편리와 안전일 겁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자동차를 탄 사람이 보행자보다 우선시되고 있다는 점을 느끼실 겁니다. 걷기 좋은 거리보다는 차가 달리기 좋은 거리를 만들어야 하며, 횡단보도를 여유롭게 걸어서는 안 되고, 자동차가 자주 멈추지 않도록 육교를 올라가 길을 건너야 합니다.
정적인 순간 중에서 휴식, 특히 노동자의 휴게공간은 어떨까요? 제가 알바를 했던 건물은 복도와 계단실 사이에 부속실이라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곳은 휴게공간이 따로 없던 청소노동자분이 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던 겁니다. 환기도 되지 않는 1평 남짓한 공간, 파란 원통형 쓰레기통,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
길은 차를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직종, 상황,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서 쉬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