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중간지대
도서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다른 공공문화시설도 머무르기 좋습니다. 잘 찾아보면 마당이나 로비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곳도 있고, 무료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특히 미술관은 도서관이나 공원처럼 '느림'을 전제한다는 매력이 있죠. 꼭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최근에는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나 작은 도서관이 여럿 생겨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시청 로비에도 간이도서관이 있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서관처럼 공공시설로 규정되는 공간만 사람들을 포용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민간 서점 중에서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책을 보다 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놓은 곳이 있으니까요. 실제로 우리 사회는 법을 통해서도 민간 영역에 공공성을 요구합니다. 건축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 공개공지를 만들도록 하고 있죠. 해당 영역에 있는 팻말을 보면 '열린 공간. 이곳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공개공지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 공공성이라는 개념은 <2-4. 조화> 편에서 다뤘듯이 경관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에서 공공성은 왜 중요할까요? 공공건축을 연구하는 이영범, 염철호는 『건축과 도시, 공공성으로 읽다』에서 사유와 공유, 사익과 공익이 극단적으로 분할되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도시공간적 대안을 찾습니다.
도시에서 혼자의 삶이 함께 사는 삶으로 전환되거나, 궁극적으로는 함께 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공과 사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나 사유의 지배가치가 만드는 갈등과 모순을 보완할 수 있는 제3의 가치를 필요로 한다. 이의 대안적 가치로서 등장한 것이 공공성이다.
민간 도서관입니다. 한 달에 두 번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예약을 하면 무료로 전시를 볼 수 있는 미술관입니다. 계단에 방석을 놓거나 전시관 바닥에 빈백을 놓아둔 구역도 있습니다(왼쪽 사진).
백화점과 통하는 계단 한편에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외부 곳곳에 앉을자리가 많습니다(오른쪽 사진).
인도에서 바라보면 테이블 자리가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찻길과 충분히 떨어져 있고, 의자와 테이블도 많고, 점심 시간대에는 남쪽에 있는 아파트가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공개공지 중에서는 훌륭하게 조성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개공지라고 하는 곳도 정말 사람을 위한 공간인지는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합니다. 그늘도 없는 맨바닥만 있거나, 너무 좁거나,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바로 옆에 있다면 그곳이 열린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건축가 서현은 자본이 갖는 성질이 이 같은 현상을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많은 경우 건축가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은 자본의 배타성에 의하여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지나가는 행인이 잠시 앉아 있을 공간은 필요 없고 한 치라도 더 많은 면적을 임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의 언제나 이기게 되어 있다." 돈을 내지 않으면 거리에서 쉴 만한 데가 별로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죠. 앞에서 언급한 공과 사를 잇는 대안적 도시공간이 더 절실해집니다.
그러한 공간이 공급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역시 해답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능동성이 얼마나 발현되고 있는지 되물을 필요도 있습니다. 6년 전 프랑스 낭트의 한 미술관에서 마주한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청년들이 스케치북을 들고 미술관 바닥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겁니다. 공공 예절과 능동적인 이용 사이에서 조율이 필요하겠지만, 문화로 정착된 자유로움이 부러웠습니다. 마침 이 글을 쓰러 오는 길에 아이 둘이 시청 입구 바닥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더군요. 이렇게 공간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능력을 아이들은 물론이고 성인들도 발휘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죠. 2022년 서울시는 도시공간기획팀 주관으로 '감성여가공간, 서울쉴틈 찾기'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서울시 내 공공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지 전문가와 시민의 제안을 받고 수상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전문가 부분과 시민 부분을 합쳐서 총 39 수상작 중 실제로 조성된 건 서너 작품뿐이었지만, 이런 시도와 문화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정치학자 하승우가 『공공성』에서 말하듯,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얼마나 많은 시민들과 연관되고 그들의 삶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공공성의 여부가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민간 미술관입니다. 이렇게 좁고 텅 빈 공간이 어떻게 쉼터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돗자리나 의자를 두고 앉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건물주가 그늘막을 설치해 준다면?
공공 미술관입니다. 휴게 공간, 작품을 보면서 앉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의자가 있습니다.
앉는다는 행위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합니다. 목적이 무엇인지,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 위치를 선택할 수 있는지 등에 따라 앉는 행위의 자유로움과 만족감이 달라집니다.
'감성여가공간, 서울쉴틈 찾기' 공모전 시민 부분 대상작입니다(왼쪽 사진). 정자만 있던 자리 주변에 벤치를 추가로 설치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전문가 부분 최우수작입니다. 도서관 외부 공간을 새롭게 꾸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