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남는 것들

by 글그림



걷다 보면 멈추게 되는 계단

한 계단씩 흘려놓고 간

신발 밑창 소리

그런 곳에선 늘 숨이 모자라

내려가는 것도 오르는 것도

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


서랍장에는

한 달째 먹지 않은 약봉지가

붙박여 있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는데

처방전을 꺼내 읽을 때마다

병명을 되새기는 것처럼

익숙하고 낯선 느낌


집 근처 편의점에는

사지 않는 음료가 있어

들었다가 다시 놓는 순간마다

똑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건

원래 거기 진열되어 있던 시간이

기억나기 때문인가 봐


버스정류장 유리벽에

어깨를 기대면 누군가 울다 간 자리에

잠깐 등을 대고 있는 느낌이라

그 사람의 눈물 일수도

햇빛일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요즘도 가끔 생각나?’

라는 말은

‘안 나는 척’으로만 대답하게 되는 걸까

잊었다기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도 없이

물러서는 것이

끝은 아니었으면 해


세탁소에 맡기고

찾지 않은 셔츠가 한 장 있어

다림질 자국도 흐려졌겠지

하얗던 옷깃이 바랜 만큼

마음도 희미해졌으면 좋겠는데

어떤 기억은 바래지질 않지


지날 때마다 살고 싶은 집 하나 있어

들어서지도 않으면서

살고 싶어서 살지 않는 집


그러니까

이건 느리게 남는 것들에 대한 기록


기억보다 오래

감정보다 조용히

느리게 남는 것들

말로는 옮길 수 없어

글로 옮기게 되는 행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