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던 중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엔 좀처럼 전화는 잘하지 않고 카톡으로만 연락하던 터라 받기 전부터 급한 일인가 보다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 외할머니 돌아가셨다."
처음 들어보는 울음기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기에 언젠가 닥칠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들으니 이 감정을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웠다.
"금방 갈게, 엄마."
오후에 이른 퇴근을 하고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다.
엄마를 만나고 나서는 울지 않고 싶었다.
엄마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기댈 수 있는 딸이고 싶었다.
장례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십 대 초반, 처음 겪어보는 가까운 가족의 장례식이었지만 내가 할 건 별로 없었다.
그때,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소식을 듣자마자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병원 생활을 하면서 치매도 앓으셨다.
엄마와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고 괜찮은 날도 있었다.
오빠를 처음 외할머니께 소개해드린 날도 병원이었다.
"할머니. 내 남자친구야."
말없이 오빠의 얼굴을 응시하던 외할머니는 갑자기 대뜸 물으셨다.
"성이 뭐라?"
의외의 질문이라 처음에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심 가예요."
내 대답에 할머니는 "귀한 성이다. 귀한 사람이야." 하시며 오빠 손을 잡고 토닥이셨다.
'우리 손녀를 잘 부탁한다.' 같은 할머니로서 할 수 있는 당부의 말씀 같은 건 하지 않으셨다.
그 뒤로도 외할머니 병원에 가는 날엔 오빠가 나와 엄마를 태워주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은 주말 출근으로 오빠가 함께 가지 못했는데,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나를 알아보셨다.
"친구는?"
"응? 누구?"
"심 가 친구는?"
오랜 병환으로 자식들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시던 외할머니가, 오빠의 성을 기억하고 계셨다.
오빠가 오지 않자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일하러 갔어요."
짧게 대답하는데, 목이 매여왔다.
자주 찾아뵙지 않던 외삼촌들의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하시던 외할머니가, 내 남자친구의 부재를 묻는 모습에 고마움과 원망이 동시에 밀려왔다.
생업이 바빠 그랬겠지만,
그날따라 외할머니가 오빠를 기억해 주신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아 외삼촌들을 향한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빠는 거의 처음 보는 내 친척들 사이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낯선 사람, 어색한 분위기를 몹시 어려워하는 사람인데도,
그날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처음 보는 어른들과 인사도 나누고,
손님들에게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와중에도 나를 살폈고 밥을 먹을 땐 편치 않은 자리에 체하기도 했다.
덕분이 몸이 좋지 않은 와중에 꾸벅 졸기도 하면서 집엔 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외손주사위라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법한 자리를, 그냥 남자친구면서.
마지막 날, 발인에 온 가족이 함께했다.
외할머니를 도맡아 간호했던 이모, 오랜만에 보는 외삼촌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사람이 많기도 했다.
스무 명이 넘는 가족이 외할머니와 마지막 인사에 동행했다.
발인을 따라 모두 장례식장을 비웠던 그때, 뒤늦게 도착한 손님에게 상황을 설명한 건 오빠였다고 나중에 들었다.
단 한 번의 장면만으로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라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에 대해 조심스러웠고, 쉽게 믿을 수 없었고, 쉽게 기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빠와의 연애는 조금 더 길었다.
고맙고 따뜻했던 순간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닐지도 모를 작고 소소한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또 쌓여 지금에 닿았다.
그리고 그날,
장례식장에서의 오빠 모습은 그 수많은 조각 중 하나로 또렷이 남았다.
그 조각은 내가 마음 놓고 기대도 좋을 만큼 단단했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