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도 없이 쏟아진 장마에 온몸이 흠뻑 젖은 날.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몸과 마음에도 비가 쏟아졌으나,
결국 해는 떴다.
"그동안 너무 잘 해왔어.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마지막 검사를 해봐야 확실하겠지만, 결과가 좋을 것 같아."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진료실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항암 치료가 끝나면 PICC 관 제거는 언제쯤 가능한지,
루프린 주사는 언제까지 맞아야 하는지,
여행은 다녀도 되는지.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고 진료실을 벗어났다.
진료실에서 나오는데 웃음도 같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앞에는 여전히 대기 중인 환자분들도 많이 앉아 계셨기에 너무 좋아하는 건 실례인 것 같아 꾹 참았다.
마지막 항암 치료를 다 마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수서역에 도착했다.
플랫폼 의자에 앉고 나서야 엄마랑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그리고 얼마 뒤, 최종 PET-CT 검사를 마친 후 나는 완전관해 판정을 받았다.
가족들을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기도로
나를 적시던 장마는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물론 완전관해가 항암 치료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지 모든 병원 생활의 끝은 아니었다.
앞으로 산부인과 치료도 받아야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항암을 안 하는 게 어디람.
항암동안 고통을 감내했던 PICC 관 삽입 부위의 피부가 엉망이 되어 너덜너덜했지만,
이제는 회복만 남겨뒀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기분 좋게 받아들여졌다.
감사하게도 내가 만난 의사 선생님은 굉장히 친절한 분이셨다.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연약한 환자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라
언제나 웃음으로 따스하게 맞아주셨다.
마지막 검사 결과를 듣고 앞으로 정기 검사만 하기로 했던 날,
나는 그동안 담아왔던 질문을 꺼냈다.
"아기는 언제부터 가질 수 있나요?"
내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살짝 놀라시는 듯했으나, 곧이어 벌써 결혼했냐며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산부인과 선생님과도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혈액종양과 입장에서는 마지막 항암 후 1년 뒤가 좋을 것 같아."
이미 산부인과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던 터였다.
산부인과에서는 "강제로 멈춰뒀던 생리가 자연스럽게 시작되면, 몸이 임신할 준비를 마친 것이니 언제든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다.
두 의견 중 더 긴 시간을 택해, 나는 1년 뒤 아이를 준비하기로 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빨리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놀고 싶고, 좀 더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철없던 20대의 끝자락에서 비에 흠뻑 젖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놓치고 있던 수많은 감사와 함께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얻고 30대를 맞이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의 1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그동안 나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엄마를 위해 모녀지간 오붓한 여행도 다녀왔고,
일하던 곳에 복귀해 내가 없었던 사이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 가족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도 나눴다.
무엇보다 남편과 아이를 주제로 한 대화를 많이 했다.
나의 마음에 생긴 변화가 가장 많이 묻어나는 건 언제나 말이었다.
생기지도 않은 아이의 얘기는 틈만 나면 나왔다.
"만약에 아이가 생기면 지어주고 싶은 이름 있어?"
"심청이?"
"혼날래?"
"심봤다?"
"아무래도 장날에 오빠를 팔아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실수했네."
"심쿵이..."
"아니, 누가 애 이름을 그렇게 지어?!..... 태명으로는 괜찮겠다."
수많은 '심'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오갔고, 장난처럼 나온 말이 결국 태명이 되었다.
'심쿵이.'
우리는 생기지도 않은 아이의 태명을 정한 뒤로 자녀에 대한 교육관이나 훈육 방법 등을 논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마지막 항암 후 1년 뒤, 산전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내 몸이 얼마나 회복이 되었는지 궁금했고,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의사 선생님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자연 임신이 어려울 수 있어요. 된다고 해도 유산될 가능성이 높아요."
이어지는 자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암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의사 선생님 앞에서 울지 않았는데,
임신이 어렵다는 얘기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휴지를 건네며 나를 다독였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3개월 정도 짧게 자연 임신을 시도해 보고, 몸도 마음도 지치기 전에 시험관으로 넘어가요."
".... 싫어요. 힘들고 아플 것 같아요."
"항암도 이겨냈는데, 그에 비하면 시험관은 아픈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요. 아팠으니까, 그만 아프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오랫동안 대화했다.
자연 임신 시도도 '숙제 날'을 받으러 병원에 정기적으로 가야 했는데 나는 그마저도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했다가, 장난이 섞였다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며 가닥을 잡아갔다.
"난 더 이상 이 문제로 병원 안 갈래."
"그래, 여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자연 임신 시도해 보고, 1년 뒤에도 안 생기면 그때 다시 고민할래."
"좋아. 근데 생길 것 같아."
남편의 낙천적인 대답에 짜증이 밀려왔다.
"무슨 자신감이야? 어렵다고 하잖아."
아까까지 나눴던 대화가 다 소용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병원에서 어렵다잖아.
생기더라도 유산될 가능성이 높다잖아.
"그냥, 우린 잘 될 것 같아. 걱정하지 말자."
"나만 이 문제에 진지한 것 같아서 짜증 나."
"그런 거 아니야. 안되면 내가 경주에서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텐트 치고 줄 서서 한약이라도 받아올게."
내 눈물은 남편 앞에서는 한없이 흔했다.
특별히 말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뭔가 불편한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고,
오빠는 그저 나를 다독였다.
그땐 그냥 오빠의 긍정적 생각들도 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기를 준비하기로 하고 자연스럽게 피임을 하지 않은지 두어 달.
가족들과 스키장 여행을 앞두고 짐을 챙기던 어느 날 아침.
생리할 때가 되었으니 생리대도 챙겨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어든 임테기는 두 줄을 보여주었다.
매직 아이로 봐야 겨우 보이는 흐릿한 두 줄이 아니라, 무척이나 선명한 두 줄.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나 분명 수많은 '임밍아웃' 영상을 보며 '나도 멋지게 오빠를 놀라게 해줘야지!' 생각했었는데.
막상 갑작스럽게 그 순간이 찾아오자 이벤트 생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오빠. 오빠?? 나와 봐."
떨리는 목소리로 오빠를 다급히 부르자 놀라서 뛰어나온 남편은 내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보았다.
그러고는 화장실 앞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나를 꼭 안아주었다.
기다렸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너무도 빠르게,
우리에게 따스하고 소중한 햇살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