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나는 혼자 샤워를 해왔다.
당연하지 않은가.
신생아 때라면 모를까, 손가락을 다쳐 깁스를 해야 했을 때도 멀쩡한 다른 손으로 야무지게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었다.
치료를 위해 내 몸에 삽입된 관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관의 관리가 문제였다.
항암이 종료될 때까지 기약 없이 내 몸에 심겨 있을 이 관이 혹여 막히지는 않을까, 잘못 관리해서 감염의 경로가 되지 않을까 늘 신경 써야 했다.
물이라도 들어가면 감염 위험이었다.
팔에 달려있는데 떼낼 수도 없는 이 관을 부여잡고 물도 닿지 않게 관리해 달라는 것도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는 땀도 너무 흘리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했다.
7월 말, 한여름.
항암과 함께 시작된 'PICC 관 관리'
지방에서 서울까지 통원 항암을 하는 나 때문에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 병간호를 자처했다.
"엄마는 나보다 동생을 더 좋아한다."며 투정 부리던 과거의 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자식 사랑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을까.
좀 더 아픈 손가락과 좀 더 걱정되는 자식이 있어 부모의 표현이 달랐을 뿐.
부모는 그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인데.
"나 혼자 씻을 수 있어. 방수 테이프 붙이면 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물이라도 들어가면 어떡할 건데?"
항암 초기. 샤워 문제로 잠시 투닥거렸으나, 결국 엄마 말이 맞았다.
혼자 씻는 것보다 도움을 받는 게 훨씬 안전했다.
다 큰 몸뚱이.
엄마에게 맡겨놓으니 그저 민망하고 미안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자꾸 혼자서도 씻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혼자 샤워를 하면서 한 번도 그 사실에 감사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암 진단을 받기 몇 달 전인 4월, 귀여운 조카가 태어났다.
만나면 내가 안아보겠다며 덥석 데려다 안았고,
낯가림도 하기 전이었던 작은 꼬물이는 내 품에 안겨 곤히 자기도 하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모를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관 삽입 후 다시 만난 조카를 안아보려 하자 동생이 득달같이 말렸다.
"언니, PICC는 무거운 거 들면 안 돼."
간호사인 동생의 말이기도 했고, 관 관리 교육을 받을 때 병원에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안 무거워."
"무거워."
무게 제한이 몇 kg인지 따져보며 우기다가,
결국 다른 가족들의 만류에 손을 잡고, 발가락을 만져보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조카만 못 안았던 것도 아니다.
혹시 관에 무리가 갈까 봐 남편을 있는 힘껏 안을 수도 없었고
온 침대를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장난치던 일상은 멈췄다.
한창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남편과 격리되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남편이 먼저 걸려온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분리된 생활을 하던 때에 나는 코로나가 아니라 우울증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문 하나만 열면 만날 수 있는데 코로나가 뭐라고.
마주 보고 대화할 수도 없고, 매일 하던 포옹이나 뽀뽀 같은 가벼운 스킨십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오빠가 너무 보고 싶다."라고 엉엉 울자 할머니는
"코로나 걸리더라도 봐야지, 그렇게 살 수 있겠냐."라고 하셨다.
그러게.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며칠 후 직접적인 접촉도 없었건만 발열과 기침이 동반되더니 코로나 판정을 받았다.
나는 병에 걸렸다는 슬픔보다 오빠를 편하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방문을 열고 남편을 안고 펑펑 울었다.
그 며칠 안지 못했다고 공허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항암 치료동안 꽉 안을 수 없다니.
그래도 가벼운 포옹이 가능함에 감사해야 하나...?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병이 마음을 좀먹는 기분이었다.
가장 의외의 감사함을 찾은 곳은 머리카락이었다.
원래 빼어난 미인도 아니었던지라 머리카락이야 있든 없든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인이 아니면 머리빨이라도 필요한 법이었다.
항암으로 인해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감당되지 않았지만,
청소는 엄마 몫이라며 죄책감을 가득 안고도 포기하지 못했다.
"엄마가 밀어줄까?"
"아니야. 아직 많잖아.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잖아."
엄마는 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으셨다.
샤워 후에 좀 더 수고스러워도,
자고 일어난 베개 위에 수북이 남은 머리카락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치워주셨다.
그러나 내 고집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두피가 따갑게 아파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졌다.
머리를 밀면 해결된다는 말에 나는 결국 큰맘 먹고 머리를 밀었다.
반들반들한 두피를 만지는 날 보며 엄마가 "넌 두상이 예뻐서 밀어도 예쁘다." 하는데
나도 별스럽지 않게 "그러게. 나 좀 예쁜 듯?"하고 웃었다.
하지만 모자를 쓰지 않고 외출할 용기는 없었다.
엄마 앞에서 거짓말했다.
사실 이런 와이프가 집에서 기다리면 남편은 집에 오고 싶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픈 와중에도 나쁜 생각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밖에는 예쁜 사람들이 가득한데, 나는 못생긴 데다 머리카락도 없다.
"못생겼어."
"예뻐."
"오빠는 바람피울 거야."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내가 꼴 보기 싫은데 남은 오죽하겠어."
"남 아니야. 여보는 머리카락 같은 거 없어도 예뻐."
날이 갈수록 집에 있는 거울을 죄다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싫어졌다.
항암 때문인지 피부도 푸석해진 것 같고, 그냥 고장 난 나 자체가 엉망진창 같았다.
내가 같은 주제로 몇 번이고 남편을 괴롭히자 오빠는 어느 날부터인가 오며 가며 나를 볼 때마다 두상에 냅다 뽀뽀를 하기 시작했다.
출근할 때도, 돌아와서도, 누워있다가도.
머리카락도 없는 내 정수리에다 "쪽"하고 뽀뽀를 했다.
그때마다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여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하지 마. 그만해."
처음엔 짜증이 나고 뭐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신기하게도 내 모습이 조금 덜 밉게 느껴졌다.
오빠 말대로 머리카락이 없어도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내 평생에 언제 이렇게 대머리로 살아보겠어? 신기한 경험이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단발까지 길어 이제는 과거의 민머리를 찾아볼 수 없지만,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PICC 관 삽입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머리카락이 있는 삶에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
'있을 때 잘해라.'는 옛 어른들의 격언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사람끼리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라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아침 뜨는 해를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 손으로 차린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남편과 평온한 일상을 보냄에 감사하며.
나는 아픔을 통해 건강을 잃어보고 나서야 일상에 감사하는 자세를 더 깊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