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4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苟或父而不子其子하며
구혹부이불자기자
子而不父其父하면
자이불부기부
其何以立於世乎리오
기하이립어세호
‘만약 혹시라도
부모이면서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식이면서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겠는가’
저는 한자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 보통은 해석되어 있는 걸 먼저 읽습니다. 제가 직접 해석하기 전에 일단 기존에 한글로 번역된 내용을 먼저 보는 것이죠.
이번 문장의 해석된 내용을 읽으면서 속으로 ‘그렇지! 맞지 맞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감각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부자유친'의 설명에 부합하다고 느낀 거죠.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자립’이라는 글자를 보며 달라졌습니다.
'자립'은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얘기하는 것은 '자립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해석한 '효'가 아닌 기존에 배웠던 유학에서의 '효'는 사실상 자식은 부모에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복종하고, 자라나서는 봉양해야 하니 말이죠. 그렇기에 유학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서는 '자립'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자립'에 대해 생각하는 도중, 문득 스쳐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학에서 사랑을 중시했었나?’
제 기억에 유학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중시했지 애(愛)를 중시한 기억은 없습니다. 물론 이전에 쓴 글에서 제가 '효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들어가 있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애(愛)'를 직접 언급한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보통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독교지, 유교에서는 사랑을 논하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배운 적이 없거나 관심이 없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찾아본 해석에 어째서 사랑이란 단어를 넣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그러다가 '어쩌면 이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한자로 쓰인 원문을 직역해 보죠.
苟或(구혹)
만약 혹시라도
父而不子其子(부이불자기자)하며
부모이면서 그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으며
子而不父其父(자이불부기부)하면
자식이면서 그의 부모를 부모로 대하지 않으면
其何以立於世乎(기하이립어세호)리오
그가 무엇으로써 세상에서 설 수 있겠는가?
역시나 '愛(사랑 애)'가 직접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석할 부분도 없습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나 자식이 부모를 대할 때 기본적으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아닌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보통 후천적 학습이나 상황에 의해서 생긴 다양한 이유로 미워하게 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맞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한자는 효율적인 문자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도록 가장 상징적인 것을 바탕으로 글자를 사용하죠. 이는 반대로 말하면, 쓰이지 않은 것은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처음의 해석에 있는 ‘사랑’은 원문에 직접적으로 쓰이지 않았기에 이 문장에서는 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 내포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틀린 게 아니지만, 저 문장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은 아니란 것이죠.
더 정확히 하자면, 사실 이번 문장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냐, 안 하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유학은 감정의 원인이 되는 것을 알려주고, 방식을 알려주어 납득하고, 행동하게 하는 학문이지, 감정 자체를 중요시 여기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저는 이번 문장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는 핵심 단어는 '立(설 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원문 자체가 부모가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고,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서 대하는 것만이 '立(설 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苟或(구혹)'을 집어넣으며 질문 형식을 취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기에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냐?’라고 말한 것이죠.
그러나 당연하다고 묻는 것과는 별개로 왜 이것이 당연한지, 왜 부모와 자식이 부모, 자식으로 대해야지만 '立(설 립)'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전 글에서 말한 '敎(교)'와 '諫(간)'으로 소통함으로써 납득시켜 주는 것을 행하지 않은 문장이라고 볼 수 있죠.
특히나 어린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한 첫 교재로서는 이 부분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더욱 제대로 설명해서 납득시켜 줬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장이 가진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그간 해오던 대로 '立(설 립)'의 뜻부터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立(설 립)
기본적으로 ‘서다’, ‘세우다’라는 뜻이고, 이외에도 ‘전해지다’, ‘정해지다’, ‘존재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임
이 단어의 어원인 갑골문에서는 'ㅡ(대지)' 위에 '大(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 누구라도 ‘서다’라는 의미를 연상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잠깐 ‘마주보는 것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랬다면 보는 것을 의미하는 눈도 추가해서 그리지 사람만 덩그러니 그리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우다'라는 뜻은 어디서 나온 걸까?'
저는 처음 '세우다'라는 뜻을 봤을 때에는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먼저 연상됐습니다. 그리고 '서 있는 것'을 표현하였기에 자연스레 '깃발을 세운다'든가, '누군가를 세워 놓는다'든가와 같이 어떠한 물리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였지요.
그러나 갑골문을 놓고 보면 동적인 의미로서의 세우는 것을 저절로 떠오르게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어떠한 움직임이 아니라 대지 위에 두 발로 서 있는 멈춘 상태의 그림이니 말이죠.
그렇게 고심하던 중 ‘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세우다’라는 의미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 있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는 겁니다. 즉,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죠. 시작을 누가 도와줬을 수는 있겠지만 '서다'는 행위는 '서 있음'을 뜻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까지 품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놓고 생각해 보면 ‘서다’라는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이고, ‘스스로 서다’를 뜻하는 ’자립‘의 의미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서 '자립'이 가진 육체적 의미와 정신적 의미를 통해 ‘서다’라는 행위를 단순히 육체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의 '자립'은 자신만의 고유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뜻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立(설 립)'은 '자신의 가치관, 의지, 뜻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정리하자면 '立(설 립)'은
육체적으로 ‘서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이를 통해 '자립'의 의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립'의 의미가 정신적인 부분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가치관이나 의지, 뜻 등을 세운다'는 의미에 도달한 것이죠.
실제로도 서 있기 위해서는 '서 있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워서 서 있거나, 자신의 뜻을 세워서 서 있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세우는 것'이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됩니다.
그렇기에 '立(설 립)'을 뜻하는 '단어'가 생긴 순서는
'서다 - 세우다'지만,
실제로 '立(설 립)'이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순서는
'세우다 - 서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우다’를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존재하다’라는 뜻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정해지다’와 ‘전해지다’의 의미로 이어지는 것도 설명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것은 뒷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立(설 립)'이 이번 문장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立(설 립)'이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 있는 행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러한 '서 있는 행위'는 앞서 말한대로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를 뜻합니다.
그리고 '서기' 위해서는
'세우는 것'이 우선이고,
'세우기' 위해서는
'뜻'이나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죠.
이러한 뜻과 가치관은 '생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이것은 고대 서양 철학자인 데카르트가 말한 유명한 문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단지, 데카르트는 중간 과정을 축약해서 시작과 결과만 말한 것이고,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서다’라는 행위로 전 과정을 함축시켜 의미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번 문장에서 '立(설 립)'이 의미하는 바는 ’서다’나 ‘세우다’가 아닌, ‘존재하다’로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其何以立於世乎 (기하이립어세호)
‘그가 무엇으로써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이 앞의 말들과의 연관성에서 보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족이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말로 본다면 사고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기에 이 내용만 보면 부모가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 대하는 것은 아예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 이번 문장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주 당연히 여기며 '너도 동의하지 않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왜 이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하고 물음표가 찍히더군요. 당연하다고 하기에는 그러지 않아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뒷부분을 제가 해석한 것으로 놓고 다시 전체 문장을 봐보죠.
'만약 혹시라도
부모가 그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고,
자식이 그의 부모를 부모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가 무엇으로써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전보다는 자연스럽지만, 여전히 뚜렷하게 의미가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헷갈릴만한, 정확히는 잘못 오해하여 해석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얼핏 보기에는 당연히 부모와 자식, 둘의 관계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존 해석만 보더라도 부모는 부모 입장에서, 자식은 자식 입장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자립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것과 자립이 무슨 상관인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립 못하는 사람이 있나?'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자립하지 못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과도하게 보호받고 양육된 이들이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立(설 립)'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죠.
근데 이렇다고 해서 직역으로 해석한 ‘서다’와 달리, 제가 해석한 ‘존재하다’가 명쾌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상하긴 매한가지죠. 각자 위치에서 '서로를 서로로서 대하는 것'과 '서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부모로서 역할을 해야지만 설 수 있나?'
'자식이 부모로 대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못하나?'
어느 부분이든 저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다 발견한 딱, 한 가지.
이번 문장이 어색해지지 않으면서도, 전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확실히 확인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를 ‘A’라는 인물로 치환해 보는 겁니다.
'만약 혹시라도
부모인 A가 A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고,
자식인 A가 A의 부모를 부모로 대하지 않는다면
A가 어찌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제가 느낀 것처럼 의미가 보이실 겁니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부모, 자식의 관계를 뜻하는 게 아니라 A라는 인물을 기준으로 조부모, 부모, 자식을 의미하는 3대에 걸친 한 가문의 '중간'에 위치한 'A'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즉,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잘 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A라는 개인이 관계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모와 자식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물론 사람에 따라 여기에서 의문이 들 수도 있죠.
‘내가 내 부모를 부모로 대하는 것과 내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라고 말이죠.
실상 현실에서 부모같지 않은 부모도 있고,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자식도 존재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위와 아래에 끼인 입장에서는 그들을 정말로 바르게 대접해야 하나 싶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들이 없으면 내가 더 오롯이 존재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후회도 많이 했을 수 있습니다.
자식은 피붙이이기에 매일 그런다기보다는 간간히 사고를 칠 때에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죠. 이는 사실 내가 독립하고 나면 부모도 마찬가지 생각을 할 겁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내 혈육들을 혈육들로서 대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틀렸습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 말에 반발심이 들 수도 있겠죠. 앞서 누차 얘기했던 다양한 부모들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자식들이 존재하니까, 그들의 행실로 피해를 입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는 딱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어떤 때는 상황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그들이 짐덩이로 느껴질 때가 있을 수도 있죠. 저도 경험해봤기에 이렇게 말하는 거지만, 제가 선언하듯 말해서 반발심이 든다면 그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감정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나'라는 존재는 '부모'와 '자식'이 있어야지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초반에 말했듯 이 문장의 중심은 '立(설 립)'입니다.
그리고 사용된 '立(설 립)'은 육체적인 의미만이 아닌 정신적인 의미로서도 쓰였기에 ‘존재하다’는 뜻으로 쓰인 거지요.
그렇다면 왜 부모와 자식이 있어야지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