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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인간이란!?!?!?

르 코르뷔지에의 <오늘날의 장식예술>

by 찡따맨
오늘날의 장식예술.jpg 르 코르뷔지에 <오늘날의 장식예술>, 이관석 옮긴이, (동녘, 2007)


책 제목에 써진 '장식예술'이라는 단어만 보면 반지, 목걸이 이야기들로만 가득 채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저자가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건축가인 그에게 장식이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명이 어떻게 사유를 하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가에 대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다시 말해, 장식을 하나의 정신 상태로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르 코르뷔지에는 단순한 건축가가 아닌 심리학자 또는 정신의학자, 철학자처럼 보일 정도다. <오늘날의 장식예술>은 이렇게 말한다. 유럽 전역이 과거의 찬란한 유산에 도취하여 금장 장식과 로코코풍 의자, 대리석 욕조를 예술이라 부르며, 으스댈 때 "그거 그냥 오래된 것일 뿐, 정신은 깃들어 있지 않은데요 ㅋㅋㅋ"


르 코르뷔지에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 중 다수는 실제로 무의미의 반복이거나 성의 없는 표절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고상한 취향이라며 좋아한 가구와 조각 대부분이 사실은 이전 세기의 것들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것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가리켜 예술이라는 이름의 좀비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질문한다. "왜 우린 아직까지 수놓은 조끼에 열광하나?" 만약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왜 아직까지도 대리석 무늬 시트지를 욕실에 붙이고 있나요?"


그는 여기서 '벌거벗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던진다. 여기서 말하는 벌거벗음은 노출증 환자가 아니다. 허위와 과장의 장식을 벗어던지고 삶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정신의 윤곽을 솔직하게 드러낸 인간의 모습이다. 그가 이상적으로 제시한 벌거벗은 인간은 쓸데없는 리본도 없으며, 말도 안 되는 장식이나 가구도 없고, 골동품 의자에 앉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이고, 기계와 평화롭게 공존한다. 예술을 위해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고로, 르 코르뷔지에는 우리가 더 이상 황금장식이나 과거의 화려함에 속지 않고 인간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출간된 시기가 1920년대다.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쿠바에서 온 재즈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위스키를 마시며, 산업계는 커다란 증기기관과 압축기를 발명하여 검은 연기를 토해내기 바빴다. 그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대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문명의 방향에 대해 외쳤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만들고 소비하나?" 그리고 그의 대답은 "인간은 이제 실용적으로 살자. 기능과 정신으로 돌아가자.", "예술이 아니라 삶을 중심에 두자."


이쯤 되면 우리는 가벼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쁘면 그만이지."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예쁘다'라고 느끼는 기준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또는 사회가 주입한 기성의 코드인지에 대한 점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여기에 대해 답을 낸다. 그는 장식예술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에 감탄하며 무엇에 현혹되었는지를 스스로 자문하라 답한다. 그리고 그것이 외부의 기준, 과거의 유물, 또는 허영심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로 유명하지만 이 책은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진이 워낙 많아 예술과 디자인 관련 책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실은 삶의 철학서에 가깝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발가벗은 인간이란 단순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 삶을 설계하며, 외부의 환상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위해 장식하고 있니?"



20250608_174701.png 2025년 6월 8일 알라딘 회원 중고가 기준


중고책 값이 왜 이리 비싼지 모르겠네요. 뭐 올리는 사람 마음이겠죠.



서평


르 코르뷔지에의 <오늘날의 장식 예술>에서 초반부에 들이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왜 사람들은 여전히 장식을 예술이라 착각하나? 조금 달리 말하자면, "왜 인간은 필요 없는 물건을 필요 이상으로 꾸미는 데 열중하나?"에 가깝습습니다. 사실 이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상당히 냉소적인 메시지로 읽힐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약간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들은 다양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그중 하나는 '성상 숭배자', '성상 파괴자'의 대비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눈앞에 반짞이는 것이면 모두 예술이라 믿는 사람이고, 후자는 반짝임이 왜 존재하는지 끈질기게 캐묻는 사람입니다. 성상 숭배자들은 과거의 양탄자, 금박 거울, 사자의 발이 달린 테이블을 보고 감탄합니다. 마치 고전 예술품 앞에서만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왕정 시대의 모조 대리석 바닥을 밟으면서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지." 라 감탄합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시선은 사뭇 차갑습니다. 그는 일종의 역사적 환상에 중독된 장식 중독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책에 따르면 성상 숭배자들은 장식을 예술 그 자체라 착각합니다. 겉껍데기만 보고 본질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 물건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 얼마나 화려하게 보이는가에만 집착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도취된 예술의 착시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도망친 채로 박물관이나 꿈의 미로 속을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박물관에서 감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설명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반대편에 서 있는 성상 파괴자는 벌거벗은 인간이라는 개념에 닿아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벌거벗었을 때에도 의미가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발가벗은 태도입니다. 그는 겉치레와 허식을 모두 던졌습니다. 사물의 겉면보다 그 이면에 있는 기능, 목적, 존재 이유에 대해 관심이 더 많습니다. 옛 왕의 의자보다 이케아 조립의자에 진정한 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심지어 설명서를 읽지도 않고 조립까지 잘한다면 초인적인 경지에 가깝겠죠. (* 이케아 조립 관련된 말은 르 코르뷔지에가 하지 않았음)


이 책에서 다뤄지는 발가벗은 인간이란, 사물을 쓰는 존재이면서 사물과 대화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우리 삶에 유용한 사물들은 우리의 하인이자 시종이지." 가구는 왕의 표식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기능적 동반자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장식은 여기서 노동의 방해물이자 본질을 가리는 눈속임의 유산이라 말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기계의 교훈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기계를 단순한 노동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계 안에서 인간 정신의 정수, 다시 말해 기하학적 순수성과 정확성, 절제미, 기능미과 목적의 완벽한 조화를 발견합니다. 기계는 감정을 지우고 원인과 결과의 순수한 관계로 세계를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을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계의 정밀함을 이상적인 예술의 구조로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르 코르뷔지에는 원반, 구체, 윤이나는 원통형 등을 통하여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인공의 정교함을 찬양합니다. 이 사물들은 단순한 기술적 구조가 아니라 감정을 고양시키는 정신의 기하학이기 때문입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순수 미학과 표현 관계의 미학은 인간이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언어이자 질서인 것입니다. 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새로운 예술이자, 장식의 종말 이후 도래할 진정한 미의 세계입니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박물관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박물관을 단순 사물들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박물관은 오늘날에도 본보기가 아닌 모조품 양산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교육자들이 발무관 속 과거의 유물을 진실한 비판 없이 진지하고 학생들에게 그것들을 넘어서도록 강요하지만 정작 사물들의 역사와 목적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과거의 잘못된 심미안까지 신성시하게 만들고, 비실용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예술 감각을 양산시킨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그는 수놓은 조끼를 입은 벌겁서은 인간의 없다고 말합니다. 벌거벗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그의 삶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박물관 속에 있는 오래된 의자나 패널 장식들은 '추함과 무지의 유산일 뿐'이라고 지적함 ' 그 자체로 교육적 가치가 없는 재항'이라는 강도 높은 발언을 합니다. 이는 단지 미학적 선호의 차원이 아닙니다. 가짜 문화와 진짜 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고로, 현대인이 박물관을 찬양하기 앞서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냉정하게 따질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표절, 민속문화" 장에서는 그가 민속의 진정성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꼼꼼하게 짚어냅니다. 민속문화란 한 민족이 세대를 거쳐 정련된 집단의 기억이자, 자발적 감동과 공감을 주는 산물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민족적 정수를 맥락 없이 차용하거나 모조합니다. 이는 타인의 시를 훔쳐 어색한 리듬으로 노래하는 행위이자, 공동체적 감각의 해체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단지 문화재를 전시하거나 관광상품화하는 것을 넘어, 현재 우리의 민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탱고, 재즈, 전통춤, 대중음악까지도 그 자체로 민속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고, 이들이 진정한 민속이 되기 위해서는 명확한 감정의 언어과 공유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며


이 책은 단순 미학 비평서로 볼 수 없습니다. 기계시대라는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어떻게 살고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껴야 하는지, 어떤 가치를 기준에 놓고 세계를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선언서에 가깝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지 못한 심미안이 어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모든 문화적 오류가 전 세계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걸 말합니다. 나아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에 놓인 의자의 차이는 단지 마감의 정밀도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며, 예술과 기능의 민주화야 말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단언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조르쥬 페렉의 <사물들>과 함께 읽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장식을 하나의 퇴행으로 보았다면, 조르쥬 페렉은 중독으로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둘 다 사물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순간 정신이 억압된다고 보았습니다.

고로, 르 코르뷔지에와 조르주 페렉은 자본주의 문명 안에서 사물이 영혼의 대체물이자 정체성이자, 꿈으로 나아가는 길로 그려지는 과정을 비판하지만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 이상을 그리며 메시지를 던진다면, 조르주 페렉은 현대의 환멸을 보고 메시지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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