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시되는 곳부터 바라보자.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미 이해했다고 여긴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시한 것들을 위대한 예술 작품은 생동감과 색채, 그 안에 담긴 개성을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그렇게 하찮아 보였던 것, 시시해 보였던 것, 익숙해 보였던 것이 놀랍게도 고결하고 신성한 대상으로 다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평범해 보이는 풍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제인 프라이리허*, 어린아이와 같은 그림체에 블랙 유머로 곁들인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있겠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작품은 익숙함이라는 껍데기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매력, 간과하고 있던 매력을 재발견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시선은 단순 위대한 예술작품을 마주했을 때에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섹스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상대의 신체적 특징까지 모두 이해하게 되어 다소 따분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술가에 빙의한 것처럼 낯선 시선으로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거나,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던 매력의 단면들을 포착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 여자친구 중 한 명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나눌 때도 오직 정상위만을 고집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표정을 읽으며,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가 대뜸 제안을 했다.
"넌 항상 위에 있는 게 좋아?"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은 내 피부를 스쳤고, 손길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손끝으로 빗어 내리고 있었다.
"응. 네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재미있어."
내 말을 들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다 질리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뒤에서 하는 건 어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낮았고, 어딘가 유혹적인 나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장난 삼아 던지는 말 같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건 내 유일학 낙인데;;; 크고 맑은 눈동자, 농담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미소, 그리고 쾌락에 젖어들 때 즈음 흔들림까지. 그걸 다 놓친다면, 무슨 재미로 이걸 하나?? 하지만 그녀는 나의 모든 무례한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도 한 번 즈음은 응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 거울 앞에서 하자."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내 눈을 마주 보며, 기대에 찬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었지만, 막상 자리를 잡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거울 속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움직일 때마다 유연하게 흔들리는 골반. 피부 위로 떨어지는 빛이 그녀의 몸선을 따라 흐르며 부드러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손끝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따라 미끄러졌다. 탄탄하면서도 매끄러운 곡선을 감싸 쥐자, 그녀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 순간,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그녀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 한쪽을 살짝 깨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새롭게 다가왔다. 늘 곁에 있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곡선과 피부가 이토록 완벽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평소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드러나다니.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몰랐어. 네 골반이 이렇게 큰지. 이거 연예인 몸매잖아 연예인 몸매. 너 완전 연예인이다. 연예인!!!“
그녀는 모델처럼 마른 체형에 가슴이 작았기 때문에 난 그녀의 모든 신체 부위가 빈약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얼굴만 보느라 그녀의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찐따 같은 감탄사만 연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녀에게 타이트한 청바지와 치마만 선물하게 되었다.
이처럼 '재발견'이라는 건, 새로운 시선 그리고 다양한 체위, 색다른 도구, 평소와 다른 장소에서의 일상적이지 않은 곳에서 따라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다소 낯설고 실험적이어서 부끄러울 수 있겠지만, 새로운 시선을 안겨주는 예술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와의 섹스는 단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 미술관을 거니는 우아한 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래된 파트너와 자주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정상이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동일한 궤적을 밟을 수는 없고, 그걸 강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예술가가 평범한 풍경에서 숨은 매력을 끌어냈듯,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서 상대방의 새로운 면모를 찾고 그 빛을 비춰주는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으로는 침대에서의 다양성 추구가 꽤나 효과적입니다. (침대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상이 반복될수록 성생활도 부지불식간에 평면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기존의 습관적 패턴을 벗어나 다양한 체위를 시도하거나, 특이하다고 여겼던 섹스 방식을 과감히 모색해 보는 겁니다.
물론 이는 단순히 모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몸과 마음에 새롭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훌륭한 촉매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랜 관계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익숙함 속에서 다시금 신선함을 발견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는 풍경이 그냥 배경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섹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익숙함 뒤에 숨겨진 새로운 매력과 설렘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체위와 색다른 시도를 통해 상대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재발견은 어떻게?
상대를 재발견하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상대의 항문까지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조금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똥, 방귀, 오줌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까르르 웃습니다. 배설물을 대하는 어른의 태도와 상반됩니다. 아이들이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배설물이 자신의 일부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후장은 불편한 신체부위가 아닙니다. 똥침을 하나의 놀이처럼 삼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소변을 가리기 위한 교육을 받고,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며 나와 타인을 명확하게 구분짓게 되면서 달라집니다. 그렇게 땀, 소변, 대변, 혈액, 토사물 등은 우리 몸에 나왔으나 한 번 몸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 되어 구분지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배설하는 행위 자체를 창피하거나 숨겨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되어 후장 또한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이런 태도는 18세기 유럽에서도 유사하게 관찰되었습니다. 당시 서구는 배설하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18세기 유럽 궁전에는 변소가 없었습니다. 귀족 부인들은 궁전 복도나 뜰의 후미진 곳에서 급하게 볼일을 봐야 했습니다. 때로는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배변을 참다가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귀족 여성들은 드레스 안에서 용변을 볼 수 있는 '부르달루(bourdaloues)'라는 용기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배설물을 혐오하거나 숨기려는 심리가 강박적 신경증'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바라보았습니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초자아(Super-Ego)'가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면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면 자신을 은폐하려는 이중적 태도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 과도한 억압은 종교적 광신, 금욕주의, 전체주의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양은 배설 행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부끄러워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방마다 요강이 비치되어 있었고, 중국의 혼수품에는 대변까지 처리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요강이 포함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침을 뱉는 타구까지 따로 갖춰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자리 잡은 이유는 한방의학의 몫이 큽니다. 고대 한의학은 주로 대변, 소변 또는 땀을 통해 병사를 배설시키는 처방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승기탕(大承氣湯)은 글자에서 볼 수 있듯 기를 승하게 하여 모든 것을 쾌통 시키는 약입니다. 고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과거의 동양과 서양을 비교했을 때, 항문에 대한 부끄러움과 콤플렉스는 서양이 더했다고 봅니다.
논외로 서양, 동양의 야동을 비교하면, 서양 야동은 후장 성교를 자주 볼 수 있고, 동양 야동은 후장 애무를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집니다. (야동을 많이 보지 않아 아닐 수 있음!!)
물론 항문이 신체적으로 가장 역겨운 부위라는 걸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질병의 원인균이 드글거리는 배설물과 직결되는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위를 깨끗하게 관리한 다음 건강하고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더 풍부하고 개방적인 예술 세계에 가까워질 거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그동안 배제하거나 은폐해 왔던 것을 새롭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성적 경험 뿐만 아니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유연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상대는 마치 전혀 다른 예술 작품처럼 보일 것이고,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곳, 그 경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상대가 예술작품처럼 바뀌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왜 전 여자친구가 됐냐고요?
그때는 제가 이기적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