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함, 흥분은 어디에 있을까!?
전 여자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그녀들은 찐따 페티시가 있었던 게 확실하다. 그런데 몇몇은 나의 패티시에 궁금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들과의 솔직한 대화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야함, 섹시함이란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참 스승을 전 여자친구들로 꼽는 이유 중 하나이다.
어느날 전 여자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평소의 당당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스마트폰을 내 앞으로 내밀었을 때, 그녀의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각종 코스튬 의상들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심한 듯 화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뭐 어쩌라고?' 같은 표정을 그녀에게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귓불이 더욱 붉어지는 게 보였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줘."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는 높게 들렸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보려 애쓰는 모습. 허세 가득한 말투로 꾸미려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진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화면 속 장바구니에 담긴 과감한 코스튬들을 하나씩 천천히 삭제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튬 의상까지 지운 후, 새로운 카테고리로 이동했다. 그녀의 맑고 청순한 이미지에 잘 어울릴 법한, 단정하면서도 은은한 매력이 돋보이는 의상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나는 그렇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스마트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졌고, 수줍었던 눈빛은 믿을 수 없다는 감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눈썹은 미세하게 찌푸러져,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하찮게 여긴 점에 대해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걸 입어. 이게 더 섹시해."
나는 그녀의 서운함을 풀어주고자 장난스럽고 가볍게 말했지만, 진지함도 담으려 노력했다.
"아니, 널 위해 입는 거야."
그녀의 표정은 한껏 굳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내 가슴 한편에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자부심, 우월감, 황홀감이 뒤섞인 듯한 감정. 그 감정은 천천히 내 전신으로 퍼져나가, 가득 채워졌고 이를 그녀에게 전해줘야겠다는 묘한 사명감이 들었다. 어쩌면 꼭 설명을 해야겠다는 전형적인 찐따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모든 남자가 이런 걸 좋아할 거라 생각했냐? 난 다르지 후훗' 같은 마음으로 섹시함, 야함에 대한 철학을 오랫동안 숙성시킨 와인을 음미하듯 굉장히 재수 없게 풀어냈다.
섹시함과 흥분은 노출과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요염함이나 섹시함을 ‘옷을 벗은 모습’, ‘드러난 살색’과 쉽게 연결 짓는다. 노출의 정도가 곧 야함의 지표가 되어버린 듯, 짧은 치마나 깊게 파인 의상을 입었을 때 “섹시하다”, “요염하다”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는 성적 매력의 본질을 오해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섹시함’의 전통적인 의미와 뿌리를 따라가면 “성적으로 매력적임”에 닿게 된다. 그래서 ‘성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몸을 드러내는 행위를 섹시함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섹시함’은 나만의 규율로 무장되었을 때 드러난다.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섹시함을 느끼는 이유도 그 사람의 강인한 ‘자기 통제’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탄탄한 몸매가 섹시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섹시함의 기본은 강력한 자기 통제이며, 여기서 뒤따르는 흥분은 ‘허락’ 또는 ‘허용’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코스튬 플레이에 흥분을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살색 노출이 아니라, “철저한 통제를 지녔을 법한 캐릭터나 직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에서 오는 쾌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삶에서 배제되어 있던 내가 ‘들어가도 된다’라는 허용을 받았을 때 진정한 흥분이 피어난다.
권위를 상징하는 코스튬의 매력
물론 이렇게 말하면 코스튬 의상 사장님들이 나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별 감흥이 없을 뿐, 감흥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코스튬의 공통점을 보면 제복이나 정장, 혹은 딱 떨어지는 슈트룩 같은 ‘권위’를 상징하는 복장이다. 의사, 군인, 경찰, 승무원, 간호사, 메이드 등 특정 직업군이 연상되는 복장이 자주 이용되는 이유, 일본 야동에서 이런 설정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력한 규율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상은 나를 주눅 들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 권위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편’이 될 때 사람들은 안도감과 묘한 성적 흥분을 함께 느낀다. 예를 들어, 모든 학생에게 공평해야 할 선생님이 나에게만 특별한 시선을 보낸다거나, 늘 바쁘던 간호사가 나만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상상이다. 그 순간 상대의 권위는 나를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지켜주는 존재로 탈바꿈해, 강렬한 감정적, 성적 흥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코스튬이 주는 흥분은 “원래는 시간과 업무에 치여 늘 바빠 보이는 사람이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내고, 사소한 대화에도 웃어주고, 기꺼이 몸과 마음을 열어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혹은 ‘이 사람에게 내가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라는 작은 두려움이 단박에 해소되는 순간, 그 반전된 안도감이 큰 쾌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정함이 관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많은 사람이 코스튬 의상에 섹시함을 느끼는 것과 내가 단정한 의상에 섹시함을 느끼는 논리는 사실상 유사하다. 당시 내가 살색이 많이 드러난 섹시 코스튬보다, 체형에 맞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원피스나 재킷 세트를 이벤트 의상처럼 입어달라고 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철저히 통제하고 지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나를 위해 경계를 내려놓을 때 따라오는 쾌감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 또한 매일 스스로를 강력하게 통제한다는 인상을 준다. 단정한 옷차림도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풍긴다. 단정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성이 거리에서 편안하게 짝다리조차 짚지 못할 것 같은, 담배 한 모금조차 맘대로 못 태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유지한 엄격한 규율이, 오직 나에게만 허락하고 무너지는 지점에서 더 큰 흥분이 따라온다. 이미 벗겨진 옷이 아닌, 단정한 옷을 하나씩 천천히 벗어 가며, “벗겨도 될까?” 하고 묻는 순간에 긴장과 허락의 설렘이 커진다.
여기서 가장 큰 흥분은 상대의 맨살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에게서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처음으로 내밀한 스킨십을 나눌 때 옷을 아직 벗지 않았음에도 손끝이 떨리는 이유는 “내가 이 사람의 몸에 닿아도 괜찮다”라는 허락을 받았다는 데서 온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가거나, 니트 스웨터를 살짝 끌어올릴 때 스치는 순간적 전율은, 맨살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색다른 감각을 준다. 비키니를 입은 모습보다 속옷을 살짝 비밀스럽게 드러내는 모습에 더 흥분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결국 진정한 흥분은 ‘벗겨진 신체’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 그 신체를 허용하는 순간’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허락은 상대에게 “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라는 신호나 다름없기에, 단순히 물리적인 자극 이상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차도남’이나 ‘차도녀’에게 끌리는 이유도, 평소에는 차갑게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만을 위해 마음을 열었을 때 느끼는 특별함과 감사함 때문이 아닐까.
흥분의 크기는 허용의 폭과 비례한다.
결국 섹시함과 흥분은 단순히 노출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강렬한 흥분은 ‘금지와 허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알몸을 쉽게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은 “네가 그렇게 해도 좋다”라는 허용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배려, 그리고 고마움이다.
그러니 상대에게 섹시함을 보여주고 싶다면, 무엇보다 나만의 규칙과 자기 통제를 더욱 단단히 하되, 동시에 특정 시점에서는 상대에게 그 경계를 허물 수 있다는 ‘허락’을 안겨 주면 된다.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체위나 색다른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둘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이벤트가 될 것이다. 과거 엄격한 통제 속에서 느꼈던 ‘금지의 설렘’을 재현하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누려도 좋다’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서로에게 부여한 특권이 이렇게 특별하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깊은 유대감도 함께 형성될 것이다.
물론 본인이 끼를 부리기 위해 코스튬을 입는 것은 좋지만, 진정 섹시함을 드러내고 싶다면 강력한 규율을 품은 단정한 옷이 좋지 않을까 싶다.
고로 인터넷에서 코스튬 의상을 사는 것보다 한복을 사서 입는 게 훨씬 섹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