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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같은 섹스를 하고 싶다면?

섹스는 죄책감보다 책임감

by 찡따맨



개성과 변태, 그 경계는 누가 만들었나?


사랑스러운, 소중한 연인과 섹스를 할 때 마음 한구석에서 잡음이 들려옵니다.

“이걸 하자고 하면, 이런 취향을 드러내면, 날 변태 새키로 보겠지..?'

이는 무조건 반사처럼 '변태'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태'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건 누가 써놓은 각본인지 말입니다.


인류학적 사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 속한 섹스가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습니다. 파푸아뉴기니의 삼비아 족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은 전사로 자라나기 위하여 소년이 정액을 섭취하는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동성애', '아동성학대' 정도의 야만적인 풍습이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비아족 내부에서는 이 행위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전사를 양성하려는 신성한 의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정액을 기증하는 성인 남성은 아동 성착취를 하는 버러지 새키가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풍습이 정상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성적 관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초변태'라고 단정 지을 만한 행위가 오히려 특정 사회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태'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시간과 공간, 문화적 맥락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다만 타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라면 이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죽창 맞을 짓이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영화 <님포매니악, 2013>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이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님포마니아(nymphomania)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의사 비엥빌(D.T. Bienville)이 '자궁에서 시작된 광기에 대한 논문'에서 여성의 통제 불가능한 성욕을 '질병'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여기서 'nymphomania'에서의 '님프(nymph)'는 호색적인 하급 요정으로 인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맺는 존재로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8세기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성욕을 통제해야 하는 관념이 강했기에, 님포마니아'라는 표현이 여성의 병적인 성욕으로 낙인찍힌 것입니다.


이제는 님포마니아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으며, 여성의 과도한 성욕에 병리적 죄책감으로 씌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병이 아니라, 개인차가 큰 인간의 성적 욕망,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정해놓은 제도, 문화적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개인의 성적 성향을 '질병', '변태'로 단정 지어온 역사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변태적인 섹스를 다 허용해도 된다는 말이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물리적, 심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만 변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순 '보는 이가 불편하다.'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를 '변태',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됩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파푸아뉴기니의 삼비아 족의 예는 극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의 의미와, 사회의 규범을 바탕으로 그것을 부정적 피해가 아닌, 긍정적인 통과의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우리 문화 그대로 대입하자는 게 아니라, 성적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판단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분리하여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변태인가 묻기 전에


섹스 중 상대에게 이상한 것을 시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스스로를 비난하기 전에 세 가지의 가치만 떠올리면 됩니다. 바로 합의, 존중, 안전입니다.

1. 나와 상대방이 자발적이고 성숙한 상태에서 동의한 것인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2. 상대의 성적인 의사 표현을 존중하는 것인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3. 안전하게 행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만 지켜진다면, 그 어떤 변태적인 섹스라 할지라도, '도덕적이지 못하다'라는 말할 당위는 크게 약해집니다.


사실 '변태', '성도착증' 같은 말들은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훈계하는 목소리 정도로 치부하면 됩니다. 문화와 시대가 달라지면서 섹스에 대한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각본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참 소중합니다. 하지만 섹스를 할 때만큼은 '도덕적 허무주의'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섹스를 꼴리는 대로 해라.'가 아닙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섹스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며


변태라고 단정 지었던 수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서 정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흐름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상호 합의에 기반한 섹스라면, "내가 변태 새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죄책감에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의 주인공처럼 위험하고 폭력적인 성향의 상대를 만난다면, "저 사이코패스 새키는 감옥이 답이다."라고 말할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욕망의 사람도 있구나."라는 이해부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섹스를 통하여 각자가 원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야 말로 섹스를 통해 더욱 풍요롭고 나다움 경험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나의 성적 욕망이 비난받아 마땅한 '변태성'인지, 다양한 인간성의 한 부분인지 가르는 것은 선택과 책임 그리고 합의에 달려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BBQ 황올 반, 양념 반을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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