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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때 착할 필요는 없다.

착한 섹스는 내가 아니다.

by 찡따맨

"착하게 살아라. 선량해져라."라는 말은 사회화 과정에서 자주 들을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진짜 나로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임무처럼 다가옵니다. 우리는 항상 더 부유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이 살 만하구나."라고 느낄 때는 착한 사람 한 두 명을 만났을 때이기도 합니다. 착함, 선량함이라는 걸 이해하기 시작하면 인생의 질과 깊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임무는 종교와 전통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던져놓은 임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의를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 착함과 선량함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물론 이는 과거처럼 엄격하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하여, 선량함과 착함을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과거의 저는 이를 섹스에도 적용시키도 했습니다.



침대에서도 착한 사람이어야 할까?


선량함과 착함을 섹스에 적용시키면 섹스를 왜곡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과거의 제가 스스로에게 “나는 침대에서도 착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외쳤던 기억을 떠올랴 보면, 상대에게 한두 번 정도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이런 사람들은 재미가 없고 밋밋하며, 성적으로 매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섹스할 때 착한 사람일 필요가 없는 이유는 섹스가 근본적으로 본능과 육체 그리고 쾌감과 욕망에 기반을 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선량함', '착함'이라는 도덕적 기준으로 섹스를 보려고 하면 섹스의 본질이 바뀌게 됩니다. 물론 섹스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존중과 배려는 섹스 전과 후에 채워 넣어도 충분합니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가 자선활동이나 봉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섹스는 서로가 욕망을 표현하고 쾌락을 나누는 원초적인 소통이라는 걸 착함으로 가려선 안 됩니다.



그럼에도 섹스를 착하게 하려는 이유는?


우리가 '착함', '도덕성'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 막연하게 "그건 나빠." 또는 "그건 틀렸어."라고 주장하는 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조너선 화이트가 말한 '도덕적 말문 막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비난'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량함과 착함과 거리가 있는 섹스 그리고 파격적인 섹슈얼리티를 다룰 때에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역겨움을 느끼면, 그 뒤에 감춰져 있는 본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혐오 요인'은 인간의 사회적 지성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배척이나 억압을 낳게 됩니다. '나는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 이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혐오는 그 자체로 증오의 엔진이 될 뿐이며, 정당성을 보장하는 게 아닙니다.



섹스는 욕정과 역겨움 사이에서


섹스는 육체적인 활동입니다. 섹스를 할 때 상대의 신체를 입으로 탐닉할 때면, 온갖 분비물과 냄새를 마주하게 됩니다. 남성의 음경이 꽃향기를 풍기지 않듯이, 여성의 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항문과 사타구니, 겨드랑이 등 어떤 신체 부위든 각종 분비물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섹스는 이러한 비위 상하는 조건들을 극복하며, 서로의 신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욕정은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추진력이라면, 역겨움을 오르가슴과 멀어지게 만드는 제동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정과 역겨움 사이에서 묘하게 균형을 이루었을 때에야 두 사람은 진정 섹스를 통해 쾌감뿐만 아니라, 관계의 충만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섹스할 때만큼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실천하는 장으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섹스할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섹스할 때, 굳이 '도덕적 결백함', '순수한 선량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임무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섹스는 서로를 위한 것이며 그동안 억눌려 왔던 욕망을 발산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장이자, 본능적인 유대감을 확인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착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섹스를 할 때 솔직한 욕망을 표출하지 못할 것이며, '착해야 한다'라는 강박이 관계 내에서도 내가 원하는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서로가 원하는 쾌락을 추구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섹스에 '도덕성'을 적용하려 드는 순간, 섹스가 줄 수 있는 풍부한 감각과 감정의 폭을 축소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섹스는 각종 체액과 냄새라는 구체적인 물리적인 감각 자극과 함께 닿을 수 없는 자아가 함께 뒤섞이는 과정입니다. 이런 현장을 마주할 때, 고결하고 우아한 자세만 유지하려고 든다면, 자연스러운 섹스와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착함에서 벗어난 자유 그리고 책임감


섹스할 때마저도 착한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상대를 함부로 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착함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아야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을 해방시킬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욕망을 존중하며 합의와 소통을 거쳤을 때에야 건강한 섹스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섹스야 말로 솔직한 욕망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배려하지 않는 악의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건강한 판단력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섹스할 때만큼은 굳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솔직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욕망을 나누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 그것보다 러닝하려고 러닝화 샀는데, 왜 한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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