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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수치심과 욕망 사이

섹스에 대한 수치심과 자기 검열

by 찡따맨


인간의 자아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상당히 점잖고 고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때로는 저속하고 경박한 자아도 있습니다. 이 두 자아는 때때로 서로 충돌하며, 행동과 사고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20대 초반 시절에 가장 강하게 충돌했던 부분은 섹스였습니다.


각종 미디어와 도덕 교과서를 통해 사랑은 배운 저는, 상대에게 다정하고 친절하며 배려 깊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성적 욕망은 이런 배려와 상반됩니다. 즉각적이면서도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정숙하고 절제된 삶을 살다가, 침실에서는 격렬하고 짐승새키 같은 격렬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럽게 다가왔습니다.



수치심과 자기 검열의 문제



성욕을 자각하는 순간, 섹스라는 말을 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점잖은 자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짐승과 같은 억압된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사회적 규범 그리고 문화적 억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거나 숨기게 됩니다. 어쩌면 이게 위선의 시작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강조하는 부분은 억눌린 욕망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으며, 때로는 해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도덕, 정의, 윤리적 가치만 내세우며 깨끗한 척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독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강조하는 건, 억눌린 욕망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며, 때로는 해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억압이론에 따르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원칙을 강조합니다. 억눌린 욕망이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가로 프로이트는 성적 욕망이 심하게 억압될 경우, 그것이 공격성으로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리비도(Libido)라는 에너지가 건설적으로 해소되지 않을 때, 파괴적 성향인 (타나토스, Thanatos)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당시 19세기 영국에서는 강한 성적 억압이 있었는데, 이 억압이 폭력적인 범죄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섹스에 대한 이중성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 자유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금기가 존재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시됩니다. 예를 들면 정치인이나 기업이니 성적 판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면 스캔들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성적인 실험을 하는 것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흑백으로 나뉠 수 없는 모호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성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야 말로 건강한 성 정체성과 관계를 형성하는 기틀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낭만주의적 사랑이 섹스의 이상향처럼 자리를 잡으면서, 사랑과 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성적 욕망과 사랑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상대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낭만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게 대표적입니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ㅂ루륜을 저지르는 이유 또한 사랑과 성적 욕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과거 역사를 들여다 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오이란, 조선시대의 기생 문화가 대표적입니다. ㅇ리본 에도 시대의 오이란이란 기생은 고객과 지적인 교류를 하며 애정을 나눴으나, 이는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기생들 또한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갖춘 여성이었고 그녀들과 교류한 양반들은 종종 사랑에 가까운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지만 반드시 성적인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진정한 섹스 해방을 향하여


섹스 해방, 다시 말해 섹스에 대해 수치심을 갖지 않고,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발정 난 강아지처럼 성적인 충동을 무분별하게 발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적 욕망을 거부하는 게 아닌, 이를 인정하고 따르는 게 시작입니다.


수많은 커플들이 성적 수치심으로 인하여 진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억압은 관계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외로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성적 취향을 항상 상대에게 공개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야 합니다. 이상하고 낯선 성적 취향도 깊게 생각해 보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섹스 해방은 개방적인 섹스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받아들이며, 수치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을 통해 더욱 진실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섹스는 단순 행위가 아닌, 인간의 본질을 반영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나를 더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섹스를 할 수 있길 바라며.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럼 너는 개방적으로 섹스를 했냐?"


"저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따라 거북선 탔다가 이 세계로 넘어온 조선시대 사람인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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