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것
인생에는 셔츠 단추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셔츠 안쪽의 라벨 읽고 세탁기 돌리기, 세금 신고하기, 사랑 그리고 섹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섹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섹스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가장 적게 이야기하고, 잘못 배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섹스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없고, 수업 시간은 언제나 비공식적이며, 선택할 수 있는 교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야동과 포르노로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종종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 볼래?"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거의 자동응답기처럼 되풀이했다.
"둘이 가면 재미없을 거 같은데? 내가 친구들 좀 모아볼까?"
내 답변은 진심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진심이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남중, 남고, 공대 테크의 찐따들은 공감할 것이다. 친구들끼리 모여 땀 냄새를 풍기며 축구나 농구를 하다가, 피시방에서 총 쏘는 게 노는 것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잡으려면 최소 4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이유는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초밥 사준다고 해서 나간 것 같기도? 아닌가? 다른 친구들일아 다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이 펑크 났었나? 아무튼 나는 그녀와 단 둘이 만나는 날이 일종의 심리적 무중력 상태처럼 다가왔다. 지구에서 밀려난 느낌. 대기권 너머 약속장소에 도착한 기분.
나는 너무 일찍 도착했고, 두꺼운 책을 펼쳐 읽었다.
당시 내가 가장 크게 고민하고 있던 주제를 탐구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다.
책 50페이지 정도를 넘겼을 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등장했다.
진심으로 말하자면, 그 장면은 약간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카페 전체가 그녀의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일 열리고 빛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타이밍 좋게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나를 찾는 듯했지만, 내 눈에는 명백하게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연습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나에게 세 가지 감정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감탄과 초조함 그리고 이 밥풀은 왜 내 바지에 붙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당혹감.
하이힐은 신은 그녀의 키는 거의 소형 SUV 수준이었다. 겉에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쳤고, 그 안에는 무릎 위와 골반 아래 어딘가에서 용감하게 멈춘 검은색 미니 원피스가 있었다. 그 위치는, 자기주장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높이에 가까웠다.
난 그때 당시 트렌치코트가 그렇게 유용한 외투인지 처음 깨달았다. 방어도 되고, 연출된 되고, 상상력에 여지를 남기는 전략적인 모호성까지 갖췄으니.
그녀는 마치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난 그렇게 '지금 내 셔츠가 왜 이렇게 구겨졌지? 이 셔츠도 연출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살짝, 정확히는 오른쪽으로 5도 정도 올라갔다.
이는 그냥 인사가 아닌, "어떠냐? 나 오늘 존나 예쁘지?"라고 말하는 듯 한 미소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니했을 수도 있는데 기억이 없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묘한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도도하지만 들뜨지도 않은 톤.
말끝마다 확신이 묻어나는 말투.
말보다 표정이 더 또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래 기다렸나? 그런데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았어."
나는 그녀의 태도에 입사 3일 차 신입사원처럼 답했다. 자꾸 허리를 숙이게 되는 기분은 뭘까? 이게 찐따 특징이지.
하지만 대화는 내가 주도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 나밖에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오만함에 젖어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처음 던진 주제는 '정보기술 사회에서의 디지털 자아' 뒤이어 '도덕적 개인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 그리고 '과정에 의해 조건 지어진 아노미와 구조에 의해 조건 지어진 아노미' 등등.
고맙게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가해보면, 이는 공감과 동의가 아닌, '네 열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에 가까운 묵언 수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 그녀는 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찐따마냥 혼자 떠든 게 분명하다. 당시의 나는 그녀의 전공도 몰랐다. 발레였나 현대무용이었나 아무튼 무용 전공자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녀의 말이 아닌, 그녀가 말하는 동안 손동작을 주로 봤다.
가끔 컵을 올리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웃을 때 눈이 살짝 접히는 각도.
이 모든 것들이 무용에 가까웠다
그녀가 사주기로 한 초밥을 먹고 나서도 우리는 헤어지지 못했다.
왜냐고?
그때 당시의 나는 언제 헤어져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바이바이 타이밍은 크게 두 가지다.
피시방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동네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야 잘 가라." 하고 손 흔들 때.
그런데 지금은? 오후 2시에 만나 밤 11시가 될 때까지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많이 늦었네??"
사실 이 말은 시간이 늦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할 것도 없는데 집에 가야 할 것 같다.'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없이 웃더니,
"그래? 나는 너랑 있는 거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나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일어날 준비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엄마 이후로 초밥 사준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고마워. 무튼, 다음에 만날 때는 친구들 잔뜩 모아서.."
내가 말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그녀는 내 손을 낚아채더니,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양 자신의 두 허벅지 사이로 슬쩍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카페의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성급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손을 빼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찐따답게 적절한 타이밍을 몰랐고, 빼는 게 예의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 손을 양 허벅지 사이에 자연스럽게 고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 손은 거의 인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따뜻했고 놀라울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보다 훨씬 더 조둉한 어조로 말했다.
"나랑 계속 놀자."
순간 뇌의 네트워크가 끊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ㅇ.. 어디서..? 이제 카페 문 닫을 텐데.. 너 게임할 줄 알아?"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수줍게 웃었다.
"아니, 그냥 방 잡고 가면 되지."
"모텔?"
그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에 가까웠다.
'찐따인 내가 이 단어를 현실 세계에서 쓸 일이 있다고??' 같은 당혹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따.
"응."
"너.. 통금 없어?"
이건 어찌 보면, 거의 도망가기 위한 마지막 질문에 가까웠다.
부모님이라는 신성한 벽을 활용해 보자는 계산.
하지만 그녀는 거의 준비된 사람처럼 대답했다.
"미리 전화하면 괜찮아."
".. 아아.... 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건 어떤 메뉴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카페에서 만나 디지털 자아와 사회구조에 대해 논했고, 초밥을 얻어먹었을 뿐인데, 어느새 나는 그녀의 두 허벅지 사이에 손을 낀 채 모텔을 고민하고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야..? 나 모텔 가본 적 없는데.."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표정은 '이 새키 정말 웃긴 놈이네.' 같은 약간 표정이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녀는 말했다.
"너는 다른 남자들처럼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하질 않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의 논리 시스템이 셧다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깊게 생각했다.
'나는 초밥 얻어먹으러 나온 건데, 그리고 모텔에 가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물론 그녀의 두 허벅지에 손을 넣은 상태로.
나는 1시간을 고민한 끝에 그녀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녀가 모든 것을 옆에서 도와줬다.
편의점에서 콘돔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고, 모텔 문을 여는 법, 냉장고 음료수가 공짜라는 것까지.
이 모든 과정은 신입 사원 연수에 가까웠다. 그녀의 격려 끝에 잘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섹스 선생님은 야동?
많은 사람들이 섹스를 배우는 방식은 기묘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조곤조곤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은 야동 또는 포르노라는 교재를 활용한 야간 자율학습으로 이루어집니다. 교사도 커리큘럼도 없는 순수한 자기주도적 학습에 가깝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섹스 이야기를 꺼낼 때 기껏해야 "콘돔은 꼭 써야 한단다.", "성병 조심해라" 정도의 말을 남기고는 방에 들어온 다람쥐처럼 급히 주제를 바꿉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러니 남는 건 하나입니다. 인터넷 몇 번의 클릭이면 도달할 수 있는, 기묘하면서도 낯설고 때로는 체위 중심적인 교육 자료들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진지하게 들어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동과 포르노는 단순 성적 욕망만 자극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낱낱이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문득 야동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걸 이성이 정말 좋아해줄까?"
"왜 나는 저 장면에 특별한 감흥이 없지?"
"나는 섹스에서 무엇을 원할까?"
"내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놀랍게도 야동은 그 어떤 교과서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이끕니다. 문제는 답을 절대 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야동은 종종 입을 꾹 다문 채로 "이건 니가 알아서 생각해라." 정도의 답만 내줄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영상들을 보며, 각자 자기만의 섹스 철학을 세우게 됩니다. 어설프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짜이고 현실입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야동을 모아, 마녀처럼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실용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마치 코감기에 걸린 아이에게 "숨 쉬지마." 라고 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종종 야동을 악마의 도구처럼 몰아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포르노는 여성을 도구처럼 다루잖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환상을 심어줘."
그런데 이 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르노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이 말에는 야동이 실제 교육적이라는 묘한 역설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수준의 교육이 아니라, 화장실에 적힌 시 한 줄 정도에 가깝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그리 낯선 풍경도 아닙니다. 17~18세기 의사들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수는 학위보다는 허풍에 가까운 처방을 남발하던 돌팔이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피를 뽑거나, 수은을 먹이는 등의 모습들을 해대곤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치료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아팠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돌팔이여도 그 빈틈을 채워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이유는 수백 년간 더 나은 의학과,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기준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는 돌팔이를 그냥 두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야동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욕은 태곳적부터 존재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불타오르며, 미래에도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바뀌는 것은 성욕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에 대해 배우는 방식인 야동 또한 18세기 돌파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근대의학이 돌팔이 시대를 넘어선 것처럼 야동의 시대도 성숙한 진화를 기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야동만을 소비하는 게 아닌, 우리만의 야동을 생산하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향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성교육의 시작일 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 어떤 야동이 좋은 야동인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더 화잘이 좋거나, 자극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덜 해치면서 더 많이 이해시키는 방식의 표현이 가장 좋습니다. 다시 말해, 감탄사와 흥분보다 이해와 공감에 닿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습니다. 우리는 섹스를 보는 능력만을 발전시켜왔습니다. 4K를 넘어 VR 시대까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능력은 아직 신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차이를 생각해보면, 기술의 진보는 눈부시지만, 내면의 진보는 아직 등잔 밑의 어둠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익숙한 비유는 음식입니다. 음식으로 바꾸자면, 정크푸드만 먹으며 건강을 망치고 있을 경우, "이제 아무것도 먹지 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식단을 바꾸라고 합니다. 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야동도 다르지 않습니다. 야동을 없애려면 일단 일본에 원자폭탄을 또 떨궈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야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버전을 만들어내고 그걸 더 잘 소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 아이들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정직한 성교육의 시작일 지도 모릅니다.
결국 처음에 던졌던 질문은 또다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섹스를 어디서 배워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야동과 포르노 보다 상대와의 대화 속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너 자신을 알라."처럼 상당히 이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섹스를 기술로 여깁니다. 야동을 보며, "저 체위는 어떤 효과가 있나?" 정도의 물리학적 관심사를 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데 섹스의 본질은 소통이자 관계입니다. 고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가끔은 말 한마디가, 손끝의 작은 움직임이, 천 개의 영상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야동과 포르노를 질책할 게 아니라, 섹스에 대해 말하고 배우는 더 좋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교육이 될 수 있으며, 아직도 바나나에 콘돔을 씌우는 후진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면 사랑하는 상대와의 대화 그리고 상상을 거치고, 상대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고로, 섹스는 어디서 배워야 하나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는 침실이 될 수 있으며, 도서관이 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 오늘도 운동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