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플, 갈망을 연출하는 것?
방치플의 짜릿함은 연애 초기에 대한 그리움?
사랑은 전 세계 어디를 보아도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게 진행됩니다. 남녀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찰나의 모습은 고장 난 엘리베이터처럼 늘 한 박자씩 어긋나고, 마음의 반응속도는 나무늘보 보다 느립니다. 그렇게 입 밖으로 "안녕하세요." 같은 간단한 인사말이 나올 때 즈음에는 이미 계절이 바뀐 상태입니다.
이렇게 유치 찬란하고 엉성한 연애의 시작은 전 세계 공용어처럼 통한다는 점입니다. 서울, 뉴욕, 파리 그리고 산티아고, 나이로비에서 그려지는 사랑 이야기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본인에게 슬쩍 눈길을 주면, 상대방은 "에이~ 나는 아닐 거야." 같은 혼잣말을 하며 시선을 허공에 두고, 마침내 서로 눈이 마주치면 호다닥 시선을 피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항상 똑같습니다. 한쪽은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거나, 어설프게 웃으며 뚝딱거리거나, 마치 오늘 처음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외계인처럼 어색한 리액션을 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들켜버리는 걸 극도로 부끄러워하는 존재일 지도 모릅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노골적인 직진은 거절과 좌절 그리고 빠른 사회적 도태로 이어졌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현대인의 플러팅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야지.', '나는 너무 바빠서 연애할 시간 없어', '오해하지 마. 난 그냥 지나가던 돌멩이야.'처럼 온갖 척척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척을 다 지나고 났을 때에야 비로소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됩니다. 물론 그 커피조차도 '이건 정말 친구로서 마실 뿐이야.'라는 양해 각서를 상대에게 제출한 후에 이루어지는 꼴입니다.
이쯤 되면, 연애 초기의 수줍음은 '예의 바름'이란 외피에 가까울 지도 모르며, 어쩌면 문화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플러팅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를 떠올려 보면, 여성에게 정숙함이란 선택사항이 아니라 기본으로 설치해야 하는 소프트웨어에 가까웠습니다. 구애의 무대에 여성을 직접 등장시키는 건 금기였고, 대신 여성들은 능수능란하게 여지를 뿌리는 방식으로 연애에 접근한 것입니다. '육금고종(欲擒故縱), 잡으려면 일단 좀 놔봐라.'라는 고사성어는 그 시대의 연애 매뉴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 심리학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척척척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사람보다, 조금 까다롭게 굴거나, 단숨에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쉽게 얻어진 호감보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에게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약간 보물찾기 같은 심리인데, '얻기 어렵다 = 희귀하다 = 가치 있다.'라는 도식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애가 시작되면 이 고상한 줄다리기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예측 불가능했던 눈빛은 '이제 끝났으니까 뭐 먹지?' 수준으로 평범해지고, 어렵게 얻은 손길은 마치 리모컨처럼 아무 데나 놓이게 됩니다. 내가 원하던 것은 드디어 손에 들어왔으니, 안심한 나머지 흐물흐물해집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찐따들은 이 지점에서 연애 초기 느꼈던 짜릿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합니다. 미치도록 헷갈리던 시선, 터치 하나 없이 머릿속이 발화하던 시절, 여기서 방치플은 욕망의 원형을 되찾고자 하는, 약간은 변태적이면서도 꽤나 정교한 장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기이한 일이다. 긴 생머리를 부드럽게 흘리며, 유난히 커다란 눈망울과 오똑한 콧날을 지닌,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녀는 내 헛소리들을 마치 롤러코스터 타듯이 짜릿하게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마냥 웃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듣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느 절묘한 지점에 있는 게 그녀였다.
오늘도 그녀는 가벼운 손짓 하나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롤러코스터를 즐겼다. 그 손끝에는 느슨한 우아함이 실려 있었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주변 공기를 향기롭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리액션에 지쳤는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잔잔한 틈이었다. 나는 그 빈틈을 기회 삼아, 조심스럽지만 다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셀카를 안 찍어?"
내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코끝이 귀엽게 들썩였고, 입술이 앵두처럼 모아졌다.
"나? 자주 찍는데? 왜?"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듯한 미소랄까. 사랑스럽지만 무방비 상태로 보면 심혈관질환으로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은 치명적인.
"그러면 왜 인스타에 안 올려?"
난 조금 더 조심스럽지만 진중하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목덜미 근처에 잔머리 몇 올이 나풀거렸다. 목이 가려울 거 같은데 긁고 싶어도 참고 있는 거겠지?
"왜? 나 매일마다 보고 싶어?"
그녀의 말끝에 살짝 웃음을 걸친 것으로 보아, 내 진심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네 보고 싶었습니다. 공주님"이라고 답해야 할 것 같은 도도하면서도 매혹적인 표정. 저런 표정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응. 좀 올려줘."
그러자 그녀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답했다.
"매일 올리면 너무 나대는 거 같아서."
그게 나대는 거라면, 태양이 너무 밝아서 사과하는 격 아닌가.. 이 친구.. 참 겸손하구나.
"그러면 카톡으로 보내줘."
"그냥 지금 많이 봐!"
그녀는 웃으며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했고, 입꼬리는 살짝 비틀었다. 고양이와 강아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생명체. 정체불명의 귀여움.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
"근데 나는 너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거든."
내가 진심을 다해서 말했음에도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무심한 제스처 속에서도 그녀만의 리듬이 있었고, 이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니까 매일 보면 되지."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점점 외교 분쟁 직전의 정상회담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단어 하나, 억양 하나가 시한폭탄처럼 작용할 수 있는 긴장감.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남은 피자 한 조각을 두고 싸우는 다섯 살짜리 남매 수준이겠지.
"넌 참 고집쟁이구나? 그냥 사진 보내주면 되는 건데."
나의 찐따 같은 말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쿡 찌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니가 더. 고집불통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도 바로 되받아쳤다.
"아니야. 니가 더."
"야. 그냥 오늘 많이 보면 되잖아?"
그녀의 말은 '너에겐 카드가 없어.'라는 트럼프의 젤렌스키를 향한 발언처럼 명백하고 반박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오늘 다양한 모습을 실컷 봐야겠지. 사실 이런 토론은 찐따가 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니까.
물론 찐따의 고집은 꺾을 수 없다.
조용한 방 안, 그녀는 침대 위에 대자로 눕혀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팔과 다리는 네 개의 수갑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 얽매임은 마치 실로 정교하게 짜인 예술작품처럼 그녀를 침대라는 순백의 캔버스에 고정시킨 것 같았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시트 위로 물결치듯 퍼져나가며 은은한 빛을 반사했고, 갸름한 얼굴은 밤하늘 아래 피어난 연꽃처럼 신비로우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큰 눈은 안대에 가려져 있었지만, 가려진 눈동자에는 세상의 모든 별빛을 품고 있을 것이다. 오똑한 코는 섬세하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숨결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귀에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깊이 꽂혀 있어 외부의 소음을 완전히 밀어내 고독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녀의 쭉 뻗은 팔과 다리는 수갑에 묶인 상황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고동쳤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형은 얽매임 속에서도 생기를 유지했고, 마른 체형은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미묘한 떨림은 얇은 종이 위에 스며든 먹물처럼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번져나갔다.
그녀에게 입혀진 팬티는 평범한 천 조각이 아니었다. 이는 심술궂게 설계된 특수 팬티로, 그녀의 가장 은밀하고 예민한 곳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장치를 숨기고 있었다. 그 미세한 진동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뒤흔들었다. 그녀의 자세는 억제할 수 없는 떨림 속에서 흐트러졌지만, 그 모습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찐따답게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모든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뜨거워질 때 즈음, 그녀의 어깨는 정정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 시트는 그녀의 미세한 몸짓에 의해 서서히 주름지기 시작했고, 방 전체가 은은한 긴장감으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고, 나는 그 경이로운 광경 속에서 시간을 잊은 듯 그녀만을 바라보며 찰나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메모했다.
만지지 않고 모두 건드리는 기술
방치플은 마치 욕망의 태양열 발전소에 가깝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욕망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가열하는 것입니다. 일단 방치플은 상대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온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어딘가에, 특정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상황에서 상대방은 그 상황에서 성적 욕구가 고조되는데, 그 욕망은 풀 수 없고, 손을 뻗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치밀하게 조율된 부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걸 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연애 초반에는 서로의 시선, 손끝이 스칠 때 세상이 멈추는 듯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이 장면을 0.25배속으로 재생하여 소중한 수신료를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막상 연애가 시작되면, 그 갈망을 해소하려는 듯이 온갖 방식으로 서로를 붙잡고, 부딪히고, 뒤엉킵니다. 마치 체력 테스트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방치플이란 이 모든 흐름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자."에 가깝습니다. 묘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향한 욕망은 야금야금 커져갑니다. 만지지 않음으로써 만져지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노리는 섹스에 가깝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잭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만 걸친 알몸의 로즈를 그리는 장면입니다. 잭은 연필을 들고 땀을 줄줄 흘리며 열심히 그리는데, 당시 어린 시절의 저는 "그렇게 더우면 난로라도 좀 끄지..." 정도의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그 장면을 보면 완전히 다른 결로 다가옵니다. 촉각 없는 섹스라고나 할까? 잭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실은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은 연필을 쥐고 있었지만, 그녀를 만지고 있었던 것은 그의 시선이었습니다. 시선으로 그녀를 훑고 신체의 굴곡을 따라가고, 그 굴곡을 머릿속으로 스캔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로즈는 손끝 하나 닿지 않았음에도 모든 걸 다 건드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만지지 않았지만, 이미 어디론가 다녀간 것 같은 로즈의 표정. 침묵 속에 흐르는 묘한 전류, 손은 가만히 있는데 몸 전체가 기억하는 묘한 자극.
고로, 이는 단순한 드로잉이 아니었습니다. 예술이라는 외투를 입은 시선 기반의 성적 교감에 가까웠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눈으로 하는 야릇 야릇한 애무랄까... 입술도 손도 닿지 않았지만 공기 중엔 감전될 듯한 감각이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타이타닉에서 그려진 이 장면은 묘한 섹스를 알려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지점이 방치플의 미학이 성립하는 첫 번째 단계일 지도 모릅니다.
방치플은 하나의 심리극
어쩌면 방치플이란 것은 연애 시작 전의 본질을 가장 노골적으로 실현한 연극에 가까울 지도 모릅니다. 육체는 접촉하지 않지만 욕망을 들끓고, 시간은 흐르는데 해소되지는 않고, 갈망이 곧 쾌락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재가 쾌락의 고조 장치로 기능합니다.
조지 버나드 쇼 아저씨는 오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소프라노는 테너를 사랑하지만, 결국 바리톤과 결혼한다."
이처럼 사랑은 늘 한 걸음 어긋난 채 시작되고, 그 어긋남은 매혹적인 방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감자칩 씹는 소리처럼 거슬려." 이 어긋난 감정의 아이러니는 연애의 딜레마이자 욕망의 역설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가장 짜릿하면서도 섹슈얼리티 하게 연출한 형태가 방치플이라는 장르일 지도 모릅니다.
방치플은 사랑의 갈망이 극대화되는 그 미묘한 순간을 구현한 것에 가깝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없기에 매혹적이고, 잡히지 않기에 지배적입니다. 고로 그 존재의 부재가 곧 자극의 기폭제가 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방치플은 연애 초기에 겪는 갈망은 있지만 접촉은 없는 그 아찔한 긴장 상태를 정교하게 재현한 심리극에 가깝습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방치플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는 관뚜껑을 열고 나와 무릎 꿇고 감탄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사도, 조명도, 배경음 하나 없는 이 연극은 묘하게도 감정의 볼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 심장은 이미 지구 세 바퀴 반을 돌아버렸고, 침묵 속에서 모든 감정이 감전된 듯한 느낌. 이것이야 말로 부재로 연출하는 감정의 서사, 다시 말해 방치플의 미학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관객 또는 본인 또는 상대는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는 연극.
물론 이 모든 퍼포먼스가 기능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항상 반복하는 말이지만 합의와 신뢰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입니다. 이것이 없이 진행하는 방치플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악행에 불과합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방치는 미학이라면, 세 가지 요소가 없는 방치는 그저 방임이자 무례함일 지도 모릅니다.
아 그것보다 운동해야 하는데 벌써 잘 시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