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시간, 그 무게에 관하여
두 명의 인간이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그것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사랑하며,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은 드라마와 같은 사랑을 갈망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꾸밈없는 모습에 실망할 수 있다. 사소한 갈등으로 상처를 받고, 쉽게 이별을 고할 수도 있다. 심지어 더 이상 이 만남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느끼면, 바로 관계를 놓아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떤 이유에서든 결국 인간은 실망감을 느낀다. 특별하다고 믿었던 상대는 결국 수많은 인간들 중 한 명일 뿐,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이 관계도 남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는 분명 이 세상에서 정말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서로의 삶에 깊은 흔적은 남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단순히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닌, 진심 어린 애정과 관심이 만들어낸 여운이다. 어떠한 일을 위해 노력을 할수록, 그 노력의 행위에 대한 흔적이 남는 것과 같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하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고, 매일 달리기를 하면 운동화 밑창이 닳아간다. 인간이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할 때, 그 노력은 분명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파듯,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흔적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다.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흔적으로 남아 상대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흔적은 단순 물리적인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일어나게 한 감정과 생각, 기억 등이 그 흔적의 예이다. 그것들은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존재의 흔적을 조용히 증명한다.
어렸을 적, 애착을 가지고 소중히 여겼던 인형이나 장난감은 누구나 한 두 개쯤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들이 여전히 곁에 존재한다면, 분명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겠다.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낡은 모습은, 그것들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유년 시절의 감정과 생각, 기억을 품고 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버린 어린아이의 모든 것을 함께한 친구였고, 시간이 지나 모습을 감춘 그 아이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증명한다. 그 증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모든 흔적은, 무엇보다 그것을 소중히 여겼던 어린아이의 서툰 노력에 담겨있다.
인간 또한 그렇다. 군중 속에 섞인 인간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저 내 옆을 스쳐가는 타인일 뿐이며, 그들의 이름과 나이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들의 삶에서 특별한 존재로 증명되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연인 또는 배우자이며, 소중한 자식이자 든든한 동료이다. 특별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과 애정이 만들어낸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증명해 주는 것은, 결국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여긴 이들인 것이다.
인간은 감정을 가졌기에 늘 불확실성을 지닌다. 감정은 물결처럼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작은 자극에도 변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증명해 가지만, 그 과정에서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하고, 믿었던 관계가 깨질까 봐 조바심을 낸다. 감정이 늘 일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할 수 없는 맹세를 주고받는다.
감정의 운명을 쉽게 확신하지 않는 것, 어쩌면 이것이 관계를 위한 최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그 자체로 관계를 지켜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뛰어넘어 상대를 지키려는 의지이다. 기쁠 때만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힘든 순간에도 서로를 지지하며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상대의 삶에 흔적을 남겼다면 그 관계에 대한 책임도 마땅히 져야 한다. 사랑은 단순한 열정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사랑하는 상대의 실수와 단점 역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떠난다면 진정한 관계를 얻지 못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정도 마찬가지다.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 관계이다.
상대의 삶에 나의 흔적이 남고, 나의 삶에 상대의 흔적이 남는 것. 그것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아간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타고난 조건만으로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관계를 위해 기울인 노력과 지켜온 시간이, 결국 누군가의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증명한다.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함이다.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