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극복해 낼 공허함
일상 속에서 혼자 다니는 이들을 마주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혼자 여행을 떠나며,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그들에게 홀로서기란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볼 홀로서기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 이들의 연대기를 의미한다. 의지했던 부모님과 사랑했던 연인, 그리고 신뢰했던 친구와 같은 존재의 상실은 누구에게나 큰 고통을 안겨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결국 살아가며 한 번은 겪게 될 상실이란, 단순히 누군가가 곁에서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며, 익숙했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낯설어지는 경험이다. 그 빈자리는 부정하고, 채워 넣으려 노력해도 그리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한 이를 마치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한다고 한다. 일정 기간을 함께하며 상대의 말투를 따라 하고, 서로의 취향을 닮아가며, 때로는 상대방의 감정조차 내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를 단순한 '타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사랑했던 존재를 잃으면 단순한 이별 그 이상의 상실감을 느낀다. "내 삶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마치 신체 일부가 떼어져 나간 듯했다." 이별을 겪은 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잃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은 잘만 흐르고,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 타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SNS에는 새로운 이슈들이 쏟아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조차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 흐름에 따라 늘 그랬듯이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과 나의 감각이 어긋나 버린 듯한 이 낯선 감정, 이것이 바로 이별이 남긴 공허함이다.
악기를 연주한 적이 있다면, 박자를 놓쳐 당황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연주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놓친 박자를 되찾아 연주를 이어갈 것인가. 이별 후에도 우리는 비슷한 선택지 앞에 놓인다. 상실을 부정하며 과거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 공허함을 온전히 마주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후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혼란 속에서 고도의 집중력과 패기로 다시 박자를 되찾아내는 것, 온전하지 못한 나 자신을 마주하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하지만 이 선택의 끝에는, 온전함을 넘어서 더욱 성장한 나 자신과 마주할 것이라고 본인은 확신한다.
공허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분명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공유했던 습관들, 함께한 순간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작은 행동들까지 공허함의 무게에 힘을 더한다. 그 사람과 함께한 일상 곳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공허함으로 마음을 짓누르기에, 이 순간이 괜찮아지는 것이 막연한 바람으로만 느껴진다. 평범했던 일상조차 감내하기 힘들어 벅찬 것이다.
그래도 많은 이들은 그것을 견뎌내며 자신의 일상을 지킨다.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의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 누군가는 일상을 바쁘게 채워 공허함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으며, 또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 감정에 결국 휩쓸려버린다. 나 또한 이별 후의 공허함을 무르기 위해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을 늘린 적이 있다. 사람들을 소개받고, 얼마 가지도 못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였다. 나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엔 나를 더 공허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런 방식들은 결국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허함은 억누르고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출수록 자신의 무게를 스스로 증명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애써 외면해도, 누군가 머물다 나가버린 틈은 내 삶에 온전히 자리 잡는다. 또한 그것을 나의 입맛대로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해어진 틈조차 내 삶이고, 그러기에 온전한 내 몫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었다.
내 몫으로 그 틈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 안의 공허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나는 지금 공허하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으면 된다. 나 자신에게 나의 감정을 솔직히 전하고, 다시 나와 연결되어야 한다. 종종 과거의 관계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저 과거의 내 행동 중에서 아쉬웠던 부분이나, 개선할 점들을 떠올리며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들만 고이 간직하자. 고마웠던 것은 고마워하고, 미안했던 것은 미안해하며 끝을 마무리하자.
그 이후에는 내 삶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도 된다. 내 감정을 기록하거나, 홀로 조용히 산책을 해보거나,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것들을 시작해 봐도 좋다. 나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본 여행을 4박 5일간 홀로 떠났다. 워낙 겁이 많아 해외보다는 국내 여행을 선호했었고, 해외를 가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낯선 곳에서 나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과는 달리, 나의 4박 5일은 최고의 추억이 되었다. 헤매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지만,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추억을 선물한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내 자신을 돌볼 수 있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더 이상 상실의 공허함을 외부에서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공허함을 마주하고, 내 삶을 정리해가는 과정 속에서 그 틈 또한 천천히 채워진다. 외부의 조건이나 다른 사람의 존재가 나의 완전함을 결정짓도록 해서는 안된다.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한 행복을 찾게 된다.
Ne te quaesiveris extra
자기 자신을 자신 의외의 곳에서 찾지 말라 -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