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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걷는 고양이 브루노

「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03

by 율하



『두 발로 걷는 고양이 브루노』

이 책을 보는 순간, 그야말로 소장 욕구가 뿜뿜하니 마음이 동해버렸다.

장 줄리앙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를 보고 욕심을 안 내려야 안 낼 수가 없었다.

브루노의 땡그란 두 눈이 "어서 나를 데려가랏!" 하고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영화 <장화 신은 고양이>의 '푸스(Puss)'를 능가하는 표정과 자태다!)










'사치 권장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마음껏 그림을 감상하고 소장할 수 없어 자금자금 작품집을 사고 그림책을 사는 독자로서 이런 책은 너무나 반갑고 고맙다. 세계적인 작가의 작업을 가까이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니 말이다.

무릇 그림책이란 그림이 포인트가 아니겠는가.

(글을 쓴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100% 순전히 그림 때문에 장만한 책이다.


노란색 커버와 브루노의 포즈와 폰트까지 삼박자가 너무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알고 보니 장 줄리앙 작가가 직접 쓴 한글 제목이라고 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글씨도 잘 쓴다는 내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좋은 예이다.






2022년에 장 줄리앙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보통 전시회를 보고 나면 소박한 굿즈를 하나씩 사곤 하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거나 가격이 착하지 않을 땐 깔끔하게 돌아서는 편이다.

당시 장 줄리앙의 풍성한 전시와는 달리 의외로 마음에 드는 굿즈가 없어서 그냥 왔던 게 살짝 아쉬웠는데

몇 년 후,

그날의 아쉬운 마음을 『두 발로 걷는 고양이 브루노』로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展, DDP, 2022.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장 줄리앙은 검은색 굵은 테두리와 땡그란 눈, 간결하고 유쾌한 드로잉, 화사한 색채로 인상 지어지는 작가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색, 자기만의 톤을 갖는다는 건

그것들을 조화롭게 이끌어간다는 건

참 멋진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장 줄리앙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표정이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머가 담겨 있다.

그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전시회에서 그의 작업 노트를 살짝 엿보는 건 상당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展, DDP, 2022.



책 『두 발로 걷는 고양이 브루노』에서도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나 브루노의 극적인 대비는 너무나 생생하다.


남다른 고양이 브루노는 여느 고양이들처럼 쥐를 잡거나 털실 뭉치를 가지고 놀거나 사료를 먹는 일엔

재능도 관심도 일절 없다.

반쯤 덮인 눈꺼풀과 초점 없는 눈, 정적인 포즈를 통해 이러한 상황이 실감 나게 전해진다.

무기력한,

뚱한,

시큰둥한,

덤덤한,

의기소침한,

시니컬한,

각 표정의 미세한 차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브루노는 호불호가 확실한 고양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순간이 오면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과 달리

두 발로 걷고(심지어 두 발로 뛰어다니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쥐를 쫓아다니고,

소꿉놀이와 풍선껌 불기와 요가를 즐기고,

가끔 꼬리로 차를 마시고,

공을 던지면 휙 날아올라 낚아채는 특별한 매력의 고양이를 만나볼 시간이다.



표정만 봐도 이미 즐겁다. 신난다. 유쾌하다.

몸짓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신난다. 유쾌하다.

한 컷으로 모든 게 다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피터와 브루노가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피터가 현관문을 열었더니 '브루노'라고 쓰인 상자에서 고양이가 쓱 일어선다.

그러자 피터가 말한다.

"이럴 수가, 브루노! 너, 설 줄 아는 거야?"



나는 피터가 브루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러줘서 좋았다.

자기가 따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아서 좋았다.

무릎을 낮춰 눈높이를 맞춰주어서 좋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눠서 좋았다.


낯선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 그리고 따뜻하게 불러주는..

처음 보는 존재를 낯설어하지 않고 호구조사에 들어가지 않고 진짜 대화를 나누는..

피터가 그런 친구라서 정말 좋았다.


브루노의 그림을 보려고 펼친 책인데, 피터의 캐릭터가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주인공을 보러 왔다가 서브주인공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상황이다.

아니,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남다른 브루노가 아닌 브루노의 남다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피터가 아닐까.

주인공이 누군들 뭐 그리 대수겠냐마는, 내가 피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이 책이 피터의 태도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함 속의 평범함도 좋지만, 평범함 속의 특별함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Book. 『두 발로 걷는 고양이 브루노』 나딘 로베르 글 / 장 줄리앙 그림 / 박지예 옮김, 봄날의곰, 2024.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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