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04
'할아버지'는 그림책의 단골손님이다.
아무래도
살아온 시간만큼 두둑한 이야기보따리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할아버지의 붉은 뺨』은 할아버지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림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 공책처럼 꾸며놓은 구성이 그리 호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읽어나갈수록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우매한 독자인 나는 이 책의 진가를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4번째 책으로 생각했던 그림책은 따로 있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책이어서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하는 일이 사뭇 기다려지기도 했던 책이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그 책을 다시 읽고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감동보다 아쉬운 부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다음 차례로 예정했던 『할아버지의 붉은 뺨』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계획을 수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앞서 거론한 책은 분명 뛰어난 '그림' 책이다. 이야기도 상당히 좋다. 그런데 화자인 아이의 입에서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말해, 아이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인데 아이의 톤이 아니었다.
또 하나, 이야기의 질감과 그림의 톤이 어우러지지 못했다. 결국 독자로서 집중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할아버지의 붉은 뺨』은 정반대의 애티튜드를 보인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아이의 시선에 맞춰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과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라 공책에 그려 넣은 듯한 삽화가 책에 활력을 더한다.
언젠가 아빠의 옛날 물건들 틈에서 학창 시절 노트가 나왔는데, 노트 한 귀퉁이에 그려진 작은 그림들이 이것과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누군가를 추억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착실하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랍을 물로 가득 채운 이야기, 배꼽 속에서 빨간 버튼을 찾아낸 이야기, 축구를 하다 비구름을 맞춘 이야기, 숲 속을 거닐다 날개 한 쌍을 발견한 이야기, 겨울산에서 눈사나이를 만난 이야기, 꿈속에서 세계 일주를 한 이야기 등등......
가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지만, 원래 이야기꾼에겐 약간의 허풍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한결 같이 붉은 뺨은 엉뚱한 이야기마저도 믿고 싶게 만드는 생동감이 있다.
그렇게 아이는 할아버지의 학창 시절 이야기, 할머니와의 사랑 이야기, 전쟁 이야기, 모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화 <식스 센스>, <유주얼 써스펙트>에 버금가는 반전은 우리가 알던 세계를 한순간에 전복시키며 놀라움과 충격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 이야기의 비밀은 직접 찾아봐야 한다.
물론 여기에 그 비밀의 열쇠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제 아이와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같은 추억을 지닌 사이가 된다.
아이는 유쾌하지만 진실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작은 사인을 보낸다.
'쉿!'
빡빡하고 고달픈 현실을 긍정적으로 치환시키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멋지다.
작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여유와 긍정, 그리고 에너지를 전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곤 이스터에그처럼 뒷장에 한마디를 남겨놓았다.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
..
이상하게 이 말이 묘한 힘을 지닌다.
그렇게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이어준다.
Book. 『할아버지의 붉은 뺨』 하인츠 야니쉬 글 / 알료사 블라우 그림 / 박민수 옮김, 웅진주니어, 2006.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