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05
열흘 전,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서부터 무무대전망대, 더숲초소책방, 청운문학도서관 코스를 걷고 왔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코스인지라 걷는 내내 살짝 들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몸이 가벼워 거침없이 걷고 나니, 다음날 무릎에서 삐그덕거리는 신호를 보내왔다.
맞다, 내가 원래 산행을 다니던 사람이 아니었지..!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걷는 일 자체가 목적인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도 산책이라는 말은 참 좋다.
나에게 '산책'이란 말은 뜻과 음과 이미지가 근사하게 맞아떨어지는 단어다.
푸르른 산내음과 싱그러운 여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걸어요』의 표지는 걷는 일에 미지근한 나 같은 사람도 일단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그러곤 푸릇푸릇한 온갖 것들의 이름과 인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청포도, 초록, 연두, 신록, 녹음, 청록, 산울림, 풍경소리, 영화 <아이다호>의 메인 테마, 영화 <와호장룡>의 대숲씬......
책을 펼치면 산책자의 가벼운 착장이 가장 먼저 반긴다.
노란 챙모자에 빨간 배낭, 짙은 초록색 등산화와 등산스틱.. 단출한 구성인데 새삼 화려하고 알찬 느낌이다.
그다음, '걸어요' 타이틀에 이어 산책자가 등장한다.
이 친구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잠시 생각했다.
여행자, 순례자, 걷는 사람.. 그중 산책자가 이 책의 무드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내부 결론(?)이 났다.
산책자는 조용히 걷는다.
"왈!"
어느 순간 털이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나타나 길동무가 된다.
뚜벅뚜벅
타박타박
둘은 함께 푸르른 들길을, 길쭉길쭉한 나무들이 늘어선 숲길을, 징검다리가 놓인 개울을 걷고 또 걷는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힘들고 지치면 차 한잔 나눠 마시며
둘은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걸어요』는 걷기를, 걷는 여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산책자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다양한 길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특히나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화면에서 차곡차곡 레이어드 된 풍경이 만들어내는 색의 질감이 참 좋다.
이 여정에서 대화도 설명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꾸준히 걸어가는 발걸음만으로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들만의 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말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저만치 앞서간 길동무를 강아지가 부른다.
앞서 걷던 산책자는 뒤돌아 제자리에 서서 길동무를 기다린다.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분위기다.
간단한 말과 눈짓과 몸짓으로 이루어지는 이들의 대화가 따뜻하면서도 시원하다.
가끔은 너무 많은 말에 지칠 때가 있다.
이들의 대화가 부러워지는 까닭이다.
길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번에는 갈림김이다.
둘은 조용히 서로를 안는다.
작별도 소란스럽지 않다.
어느 순간 길동무를 만났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히 헤어짐을 맞는다.
다시, 시작이다.
여전히 산책자는 묵묵히 걷는다.
뚜벅뚜벅
혼자 걷는 발걸음이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 길 끝에 또 어떤 만남이 있을지, 어떤 모험이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산책, 걷기..
이런 말을 보면 나는 아빠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유난히 걷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야 말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걷는 분이다.
그런 아빠가 갑자기 좀 편찮으시다.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 '얼마나 걷고 싶으실까?'이다.
다 나으시면 꼭 같이 산책을 나서야겠다.
그게 지금 내 가장 큰 계획이다.
..
..
"아빠, 우리 걸어요!^^"
Book. 『걸어요』 문도연, 이야기꽃, 2022.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