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02
어디서 정했는지 모르지만, 올해는 '그림책의 해'라고 한다.
일명 '사치 권장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뭔가 흐름을 함께 하는 기분이 들어 썩 괜찮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한 서점앱에서 인생 그림책에 대해 질문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그림책이라. 왠지 앞으로의 시간에서 만날 것만 같아 선뜻 답을 못하겠다. 그럼에도 (엉뚱하고 융통성 없는 대답은 접어두고) 하나를 꼽아보기로 한다. 두 번째로 소개할 책을 정하기 위함이다.
2025년 선정 나의 인생 그림책 『사적인 계절』
비교적 최근(2025년 1월 20일)에 나온 이 책은, 독자로서 내가 추구하는 그림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글과 그림이 꾹꾹 담겨 있어서 좋다. 풍성한 즐길거리와 생각거리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여백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또한 텍스트들이 다양한 형태로 담겨 있어 즐겁다.
그리고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은 이야깃거리가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만끽하기에 용이한 '노출 실제본'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박혜미 작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너무나 부러운데, 글까지 참 좋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아서 이런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세상이 공평하지 않아서 나 같은 평범쟁이들은 깊은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일상의 이야기를 찬찬하고 다정하게 길어 올릴 수 있는 감각이 온통 부럽기만 하다. 아무래도 이건 타고난 것이리라.
→ 여기까지 쓰고 난 다음에, 어린 시절 난독증이었다는 작가의 고백 부분을 읽었다. (p.043~045)
여전히 약간의 난독증이 내게 남아있다.
......
좋아하는 것과 나란히 서기 위해, 오늘도 문장 앞에 서 있다. 여전히 한 번 쓰고, 수십 번 고쳐 쓴다. 페이지를 쉽사리 넘기지 못하고 읽은 자리를 반복해서 읽는다.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도 괜찮다. 좋아하는 걸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걸로 다 괜찮다. (p.045)
난독증이 작가의 필력과는 무관하면서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기본적으로 당연히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난관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쌓아왔던 그 긴긴 시간들이 작가의 '쓰는 힘'을 더 증폭시켰다고 믿는다. 이러한 꾸준함과 묵묵함은 그림에 그대로 드러난다.
나뭇잎 하나하나..
꽃송이 하나하나..
주근깨 하나하나..
눈밭의 발자국 하나하나..
무수한 별 하나하나..
별빛 같은 윤슬 하나하나..
작가만의 세세한 작업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한 땀 한 땀의 수고로움이 향기롭게 빛을 발한다.
수많은 하나하나.. 를 보다 보면 어느새 화폭 속으로 딸려 들어가 장면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된다.
'향기'라는 아명(p.030)을 가진 이의 작업답게, 책은 온통 계절 향기로 그득하다.
그런데, 진한 향을 계속 맡고 있다 보면 살짝 현기증이 일 때가 있다.
그것처럼 아주 가끔, 한 땀 한 땀 힘을 실은 문장을 만날 때면 살짝 머리가 띵-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거센 햇빛에 난연히 빛나는 빗방울만이 남아 있다. 한낮의 찬란함이 손가락 끝에서 붉게 반짝일 때, 당신의 웃음이 무지개처럼 흩어져 사라질 때, 어째서 우리의 여름은 능소화로 피어났을까? 당신의 고단함을, 바람을, 열정을 먹고 자란 주황빛 아름다움을 함께 뒤집어쓰고, 마침내 문장 뒤에 찍힌 느낌표처럼 우리는 여름의 절정 아래 서 있다. (p.067)
그림에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갔듯, 글 속으로 몰입하고자 하나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작가가 전하려는 의미보다는 느낌과 이미지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사적인 계절』- 몽실몽실하니 좋은 제목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림들의 제목도 궁금해진다.
작가의 사적인 계절은 각 타이틀 만으로도 계절의 색과 마음이 그려진다.
인상적인 건 겨울부터 시작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진행되는 점이다.
사실 한 해의 시작은 봄이 아닌 겨울이기에 이러한 구성에 한껏 동조하는 바다.
보내고 기다리는 계절>>
겨울은 보내는 마음에서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작되고, 나는 그런 겨울의 애쓰는 마음이 좋다. (p.008)
재회하는 계절>>
계절이 변해도 할머니는 변하지 않았다. ... 의자에 고정된 사람처럼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라나고 죽어가는 것들을 관람했다. (p.033)
비밀한 계절>>
주머니를 탈탈 털어내도, 엉겨 있는 직조에 걸린 모래는 빠져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서걱서걱 걸을 때마다 어딘가에 붙어 있던 모래알들이 이유 없는 곳에 떨어져 새로 자리 잡는다. 어쩌면 이런 계속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p.059)
물들고 구르는 계절>>
주저함에 용기가 필요할 땐 함께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부른다. 나는 금세 씩씩해져, 다시 책상에 앉아 네가 준 믿음 하나를 쥐고 자꾸 넓어져 갔다. 환하게. (p.085)
쓰이고 그려지는 계절>>
일상은 두서없이 쓴 어제를 단정하고 정갈한 하나의 문장으로 퇴고하기 위한 수많은 반복의 과정이지 않을까. (p.101)
『사적인 계절』에는 옛날 감성이 뚝뚝 묻어난다.
우선 그림의 전반적인 톤이나 질감에서 옛날 감수성이 느껴진다. 책에 등장하는 주택이나 소품들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한국적 감성도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딱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느낌적으로 와닿는 지점들이 있을뿐더러 달, 까치, 오리, 감나무, 토끼풀, 풍등.. 등 소재에서도 우리만의 감성이 엿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고개를 쳐든다.
그렇게 세심하게 묘사하는 작가인데, 뜻밖에도 얼굴은 생각보다 디테일하지 않다.
오래전 교과서나 만화책에서 보았음직한 톤의 거칠고 투박한 라인으로 얼굴을 그려낸다. 그마저도 주로 옆모습이다. 물론 커다란 캔버스 내에 인물이 작게 자리하고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클로즈업된 장면에서도 얼굴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의도하는 바가 들어있는 게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하게 된다.
『사적인 계절』
내 기억 속에 있는 친구 같은, 친구와의 기분 좋은 대화 같은, 그런 책이다.
오랜 친구와의 에피소드를 읽다가 불쑥, 긴 시간 연락을 나누지 못했던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우린 짧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덧붙임> 5월 현재, 제주의 한 카페에서 『사적인 계절』 원화전을 열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사는 곳과는 너무 멀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프로필 사진에 담긴 지난여름 제주의 바다를 보며 위안을 삼아 보려 한다.
Book. 『사적인 계절』 박혜미, 오후의소묘, 2025.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