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01
가장 먼저 어떤 책을 소개할까.. 잠시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다.
처음이니까 '진짜 그림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오롯이 그림으로만 전해지는..
그리고 기왕이면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 탕탕 못 박을 수 있는 그런 그림책을..
『관계의 조각들』은
정말 으-른들을 위한 순수 그림책이다.
이 책은 각각의 소제목을 제외하면 글자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소제목이 상당히 작게 자리하고 있어 그림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매번 책을 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주 가끔씩, 때가 묻지 않게 조심하며 책을 펼쳐보는데 그때마다 '이런 내용이 있었나?' 하는 걸 보면 이 책이 갖고 있는 힘이 대단하지 싶다.
한국어 초판은 2017년에 출간되었으니 프랑스어 초판본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을 텐데, 여전히 동시대의 감수성과 함께 하고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관계의 조각들』은 가족관계의 시린 이면, 남녀 간의 복잡 미묘한 모습들, 인간의 어리석음,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 남의 뒤에 숨어 있는 비겁한 인간, 상대를 구속하는 관계 등 우리의 삶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직관적인 전개가 오히려 생각할 틈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작가의 시선이 결코 차갑지는 않다.
반쪽이 되어버린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장면처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있다.
이런 따뜻함은
쨍한 오렌지색의 안쪽 표지(inner cover)에서
이미 드러난다.
어느 한 부분도 무심히 자리하지 않는다.
(사실 훨씬 더 밝은 톤의 오렌지색인데 사진에는 잘 표현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책의 외형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앞서 말했듯이 이 책 앞에서는 유난히 조심스러워진다. 그게 나쁜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교과서나 문제집을 제외하고, 세상에 마구잡이로 다뤄지기를 원하는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성이 느껴지고 예민함이 느껴지는 책은 아무래도 더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관계의 조각들』은 친환경 중성지인 문켄의 퓨어러프지 즉, 코팅이 안 된 크림색 종이로 만들어진 터라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까다롭고 새침하기만 한 건 아니다.
깜찍하게도 초판 한정으로 아트 포스터와 엽서를 선물로 증정하고 있다.
작은 차이가, 세심한 배려가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아티스트 '마리옹 파욜'의 작품은 한 편의 무언극을 보는 듯하다.
움직이듯 장면 장면을 이끌어 가는 흐름이나
조용히 시선을 몰입시키는 힘,
그리고 강력한 서사가 연극적인 요소와 닮아 있어
그와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 작품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자리한다.
그래서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행간이 가파르거나 뜬금없는 지점에서는
웃음이 번져나기도 하고
가슴이 살며시 시리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가끔은 무얼 전하고 싶은지 내 머리로는 도무지 모르겠는 장면들도 있다.
어쩌면 이런 장면들이 이 책이 지닌 숨은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파고 파도 끊임없이 나오는 관계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이 책을 두고두고 찾게 만드는 건 아닐까.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스스로 세우게끔 이끄는 구성이 마음에 든다.
책장에 고이 간직해 두고서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내는 나만의 미술관 / 나만의 철학관으로 그만인 책이다. 꽤 운치 있지 않은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책이다.
관계란 참 어려운 의미이자 실체다.
어렸을 때는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만으로 그 관계가 다 이해되고 설명이 되는 줄 알았다. 좀 막연하면서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더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얹어주면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고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서서히.. 그렇지 않다는 걸,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럴 때 흔히들 하는 말, 사람은 입체적이다..
요즘에는 어려운 관계의 무게를 덜어보고자 커뮤니티를 통해 무겁지 않은, 복잡하지 않은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관계의 조각들이 모여 결국엔 나를 완성하는 것이잖은가.
무조건 기분 좋기만 한,
부담 없이 납작하기만 한,
겉만 반지르르한,
필요에 따른 유한한,
그런 인스턴트적 관계만으로 나를 이룬다면 언젠가는 마음에 영양실조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못나고 부족한 서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맞춰서 엮어가는 게 관계의 민낯이라는 걸 마리옹 파욜의 『관계의 조각들』을 보며 되뇌게 된다. 소리 없이 전하는 강력한 이야기이다.
Book. 『관계의 조각들』 마리옹 파욜 / 이세진, 북스토리, 2017.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