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레시피」 쓸데없지만 쓸모 있는 - 15
다도, 커피, 요가처럼 거창하고 전문적인 게 아니더라도 애정을 갖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만의 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나만의 루틴'은 권장되어야 마땅하다 여기는 바다.
자신만의 오롯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작이자 정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 두 시에 잡니다>
두 시가 되면 아, 오늘 밤도 끝이 났구나, 하는 안도와 아쉬움이 찾아와 어깨를 다독여줍니다. 그래서 누가 몇 시에 자나요? 하고 물어보면 나는, 두 시에 잡니다. 하고 대답해요.
나는 자는 걸 좋아합니다. 자기 직전 온몸이 가라앉아 천천히 분해되는 것만 같은 감각도, 잠에서 깰 때 천천히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몸의 구석구석 작은 부분들이 도로 합쳐지는 느낌도 나는 참 좋습니다. 그래서 늘 두 시를 기다립니다. 나는 두 시에 잠드니까요.
(...중략...)
내가 지나온 모든 두 시를 이제야 나는 꺼내보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것도 분명해지지 않는 두 시에, 어젯밤 두 시에, 내가 참 좋아하는 두 시에. 나는 잠들기도 하고, 깨어 있기도 하면서, 나의 지구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유희경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나는 아날로그적인 면이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무언가를 쓸 때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직접 손글씨로 1차 기록을 할 때가 많다. 생각이나 표현이 훨씬 더 자유로운 거 같아서 좋다. 그래서 아예 노트보다는 이면지와 막펜(막 쓸 수 있는 펜)을 주로 들고 다닌다. 각 잡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면 사실 끝도 없이 공을 들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인지라 그런 제약으로부터 아예 나를 풀어놓는다.
이런 나의 쓰기 애착에 대해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계속 압박 질문(?)을 가해왔다.
Q. 쓸 만한 도구가 없다면?
A. 괜찮다. 꼭 필기도구가 아니더라도 쓸 수 있는 도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가령 눈썹연필이라든지 립스틱이라든지..
Q. 종이가 없으면?
A. 늘 쓸 거리를 들고 다니지만, 정 없으면 냅킨이나 아무 껍데기에라도 쓸 수 있다.
Q. 손을 다치면?
A. 왼손으로라도 쓰겠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왼손 쓰기를 종종 연습한다.
Q. 왼손도 다치면?
A. 왼손은 살려주면 안 될까?
Q. 안 돼!
A. 정 안 되면, 발로라도 쓰고 싶다.
Q. 아, 왜 쓰는 걸 못하게끔 막고 싶지?
A. 흐흐흐.
뭐, 대충 이런 식의 대화였다.
아마도 나의 또 다른 창의적인 대답을 원했던 것 같지만, 난 무식하리만치 내 길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누가 보면 대단한 기록 마니아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전혀 아니다. 그냥 쓰는 게 편하고 좋고 필요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쓰기와 관련해서 나에게는 요상한 루틴이 하나 있다.
사진으로 먼저 힌트를 내보자면..
.. 이렇다.
나는 내가 쓴 글(손으로 썼든 프린터로 인쇄를 했든)이 담긴 종이를 절대 그냥 버리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분해를 한다.
공예가가 도자기를 다 빚고 나서 맘에 안 들면 망치로 일일이 깨버리듯이,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돌아다니는 게 싫어서 하나하나 문장을 잘라버린다.
가장 쉬운 건 가위로 직접 난도질을 하는 방법이다. 사실 쉬운 방법이라 말은 하지만, 상당히 힘이 드는 피곤한 작업이다.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끔 일일이 잘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지수가 많지 않을 때에만 실행하고 있다.
조금 양이 많은 경우에는 수동 종이 분쇄기를 사용한다. 사실 이것 역시 수동인지라 노동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래도 분명 가위질보다는 훨씬 더 여유롭다.
주의할 건, 국수 가닥처럼 일정하게 뽑아져 나오기 때문에 초벌 작업이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모양으로 손바닥만 하게 오려두고 난 다음에 분쇄기에 넣어야 확실하다.
가끔 드라마에서 작정하고 분쇄된 종이가닥들을 이어 붙이는 지독한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더 지독한 캐릭터임이 분명한 것 같다.(..고 쓰고 나니 상당히 지독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ㅎㅎ)
만약 더 디테일하고 많은 양의 작업이 필요하다 싶으면 최종 보스를 등판시킨다.
바로 자동 종이 분쇄기다.
물론, 회사에서 볼 수 있는 스케일의 그런 분쇄기가 아닌 미니미한 사이즈이지만, 엄연히 자동 분쇄기이다!!
지이이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은근 귀엽다.
자기도 전기제품이라고 얼마나 열심히 소리를 내는지 모른다.
이 녀석의 장점은 국수 가닥이 아니라 꽃가루 모양으로 분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벌작업이 필요 없다.
단점은 꽃가루 모양으로 분쇄를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종이가루가 날린다는 점이다. 아무튼 완벽한 분쇄를 선보이는 건 분명하다.
소박한 희망이 있다면, 나중에 회사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분쇄기를 두고 싶다는..
가끔은 꽤 긴 시간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나를 비운다.
그리고 내가 쓴 글조각들을 보면서 부족했다고 여겨진 것들을 채워본다.
불멍, 물멍, 모래멍, 돌멍처럼 '찢멍'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의 지구를 돌리고 있다.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