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순서가 만든 불평등
디플레이션의 진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디플레이션은 대체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물가가 하락하면 소비자는 구매를 미루고, 기업은 투자를 꺼리게 되어 결국 경제 전체가 침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디플레이션이 언제나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일까?
먼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이루었고, 1869년 최초의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했다. 철도의 완성은 철강과 석유 산업의 급격한 발전을 이끌었다. 이 시기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1870년부터 1890년까지 약 20년 동안 매년 평균 1%씩 하락했지만, 경제는 오히려 성장했다. 벨의 전화(1876년), 에디슨의 전구(1879년) 발명 등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지며 실질 생활수준과 소득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물가 하락이 오히려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현대 경제에서도 디플레이션은 드물지 않다. 특히 스마트폰과 컴퓨터 같은 첨단 전자제품 시장이 대표적이다. 기술 발전으로 해마다 더 성능 좋은 제품이 더 낮은 가격에 출시되지만, 사람들은 구매를 미루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디플레이션 자체가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왜 발생했는지에 있다.
디플레이션의 진짜 문제
그렇다면 정부와 금융기관은 왜 디플레이션을 그토록 두려워할까? 현대 화폐는 신용(부채)을 통해 창출된다. 신용화폐 시스템에서 은행이 대출을 실행할 때마다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돈이 창조되며, 이는 곧 부채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런 시스템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가가 하락하면 화폐의 실질 가치가 상승해 기업이나 정부가 갚아야 하는 부채 부담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자산에 빚을 내 투자한 사람들에게 디플레이션은 더욱 위협적이다. 자산 가격이 하락하면 빚을 이용해 투자한 사람들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흔히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디플레이션의 대표적 부정 사례로 꼽지만, 실제 문제는 디플레이션 자체가 아니라 버블 붕괴 이후 정부가 과도한 부채를 가진 기업과 금융기관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구조 개혁을 미뤘던 데 있다. 즉,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부채 중심의 경제구조였다.
정부가 디플레이션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정부는 세금만으로 재정을 충당하지 않고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다.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정부 부채의 실질적 부담은 급격히 증가한다. 반면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부채 부담을 자연스럽게 줄여준다. 따라서 정부와 금융기관은 지속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돈을 찍어내는 것이다.
결국 디플레이션을 두려워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소비 감소나 투자 위축 때문이 아니라, 부채와 신용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금융 시스템의 구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은 부채의 실질적 부담을 늘리며, 결국 경제 시스템 자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디플레이션은 일반 국민보다 금융권과 정부, 그리고 빚을 통해 자산을 키운 계층이 더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인 것이다.
양적완화의 진실
내수가 침체될 때마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된 저금리 기조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더욱 강력해졌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주요국들은 고금리 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최근 글로벌 경제 위축 조짐에 다시금 금리 인하를 고민하고 있다. 양적완화와 저금리 정책은 이제 특정 국가의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기본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저금리 정책은 기업과 소비자들이 더 쉽게 돈을 빌려 경제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금리가 인위적으로 낮아지면 원래 추진되지 말아야 할 비효율적 사업들이 실행되며 잘못된 투자가 이루어진다. 이런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지속되면 좀비기업이 양산되며 경제 구조는 더욱 취약해진다. 경쟁력 없는 기업들이 중앙은행의 저금리 덕분에 생존하면서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저하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는 금융시장과 경제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양적완화로 풀린 막대한 돈은 실물경제보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자산 가격만 상승하는 기현상을 만든다. 이는 자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구조를 강화하며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돈을 찍어 내는 중앙은행의 무제한적 권력 덕분에 각 국가는 더 큰 부채의 산을 쌓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자금을 충당할 수 없어서 포기했을 전쟁도 일으키게 되었으며, 다른 때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많은 프로젝트를 도입하고 각종 모험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한스-헤르만 호페 본문 中
구제금융의 역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는 금융기관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를 투입했다. "Too Big to Fail(너무 커서 망할 수 없는)" 개념에 따라 대형 금융기관 파산 시 경제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구제금융은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키웠고, 금융기관과 대기업은 실패 비용은 국민에게 전가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구조를 강화했다
은행과 금융기관들은 정부가 위기 때마다 개입할 것이란 신호를 받았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당시에도 정부는 빠르게 개입해 예금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만약 위기에 처한 곳이 중소기업이었다면 정부가 동일하게 개입했을까? 결국 구제금융의 비용은 국민의 세금과 인플레이션을 통한 화폐가치 하락으로 일반 국민들이 떠안게 된다.
칸티용 효과: 의자 뻇기 놀이
전 세계를 강타한 드라마 '오징어게임 2'에서는 의자 뺏기 놀이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제치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이 장면은 현대 금융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면 돈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되지 않는다. 돈이 시장에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경제적 혜택이 달라지는데, 이를 '칸티용 효과'라 한다.
금융기관, 대기업, 정부와 가까운 이들이 가장 먼저 혜택을 누리며 자산 가격을 끌어올린다. 반면 일반 소비자와 노동자는 나중에 영향을 받지만 이미 물가는 오른 뒤다. 결국 먼저 돈을 받은 사람이 가장 큰 이익을 보고, 뒤늦게 경제적 변화를 체감하는 일반 서민들은 그 부담을 떠안게 된다.
결국, 돈을 먼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이익을 본다. 이를 잘 이해하는 투자자들은 자산 가격이 오르기 전에 대출을 활용해 주식과 부동산을 매입한다. 반면, 뒤늦게 경제적 변화를 체감하는 일반 서민들은 이미 상승한 가격을 감당해야 하며, 그 부담은 더욱 커진다. 돈이 먼저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칸티용 효과이며, 현대 금융 시스템이 불평등을 내재적으로 심화시키는 방식이다.
무너지는 법정화폐와 비트코인의 부상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자산을 불리는 도구다. 하지만 기존 화폐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낼수록 화폐 공급이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노동소득을 축적한 사람들은 실질 부의 가치를 잃는다.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법정화폐는 중앙은행의 결정에 따라 가치가 조정될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비트코인은 총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중앙은행 개입 없이 통화량이 통제되는 비트코인은 기존 금융 시스템 문제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화폐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은 국가와 중앙은행은 비트코인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이유를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참고도서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지은이 : 필립 바구스, 출판: 북모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