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국가의 보이지 않는 개입
금의 가치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의 조부모님께서 금반지를 선물해 주셨다. 첫째 때와 같은 선물이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분명 같은 금반지인데 왜 다르게 느껴질까? 이 위화감의 정체를 밝히고자 아버지께 요즘 돌반지 가격을 여쭤봤다.
60만 원 정도 할걸? 첫째 때는 30만 원이었는데 벌써 두 배가 올랐네
금값이 급등하면서 이제 돌반지는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금값 폭등으로 인해 골드바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심지어 은까지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금 한 돈의 가격이 부담스러워질 정도라면, 과연 돈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 금값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가 쓰는 돈의 가치가 하락한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한 물가 상승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변화는 단순한 시장 원리가 아니라, 정부의 통화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의 전환 과정과 그 영향을 살펴보자.
금본위제에서 신용화폐로
19세기 후반, 연이은 골드러시가 글로벌 금 총량을 증가시키면서 각국은 금본위제(Gold Standard)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대량 발견되었고, 이후 미국은 국제 금융 질서에 맞춰 1873년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이동했다.
1851년 호주의 금이 영국으로 유입되면서, 영국이 이미 1816년부터 채택했던 금본위제를 더욱 확고히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896년 캐나다 유콘에서 대량의 금이 채굴되며, 국제적인 금 공급량이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달러)는 언제든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20세기 중반, 각국 정부는 (세계대전) 전후 복구, 복지 확충, 인프라 개발 등의 이유로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금을 기반으로 한 화폐 시스템에서는 정부가 필요할 때마다 쉽게 돈을 발행할 수 없었다. 금의 공급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부는 경제 성장과 복지 지출 확대에 맞춰 화폐 공급을 늘려야 했고, 금본위제는 점차 유지가 어려워졌다. 결국,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금 태환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달러는 더 이상 금과 연결되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기준점이었던 금이 사라지고, 법정화폐(Fiat Money) 시대가 열린 순간이었다. 이제 돈의 가치는 금이 아니라, 정부와 중앙은행의 신용이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정부 손에 쥐어진 돈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현대 금융 시스템은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더 이상 금은화폐의 가치를 보장하지 않으며,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단순히 돈을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조절하고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자유시장주의적 시각에서는 정부가 주도하는 신용화폐 시스템이 시장을 왜곡한다고 본다. 중앙은행이 법정화폐를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 있게 되면서, 통화량 증가가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지출을 강조하는 케인즈학파에서는 금본위제의 엄격한 화폐 공급 제한이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법정화폐 체제가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가능하게 하면서 금융 시스템을 오히려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제 돈의 가치는 더 이상 금이 아니라 정부의 신용과 통화정책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부가 통화량을 조절하고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부분지급준비제도와 신용 창출
우리가 사용하는 돈은 정부가 직접 발행한 것만이 아니다. 실제로 시중에 풀리는 돈의 상당 부분은 은행의 대출을 통해 만들어진다. 만약 은행이 예금액만큼만 대출할 수 있다면, 즉 예금자와 대출자를 단순히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면, 은행의 대출이 시중의 돈을 증가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르다. 대출이 돈을 증가시키는 이유는 ‘부분지급준비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 때문이다. 부분지급준비제도란 은행이 고객의 예치금을 전부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만 준비금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대출하는 방식이다. 중앙은행은 은행이 보유해야 하는 최소한의 지급준비금 비율을 정한다. 예를 들어, 지급준비율이 10%라면, 고객이 100만 원을 예금하면 은행은 10만 원만 준비금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90만 원을 새로운 대출로 제공할 수 있다. 만약, 대출로 풀린 90만 원이 어딘가 예금으로 예치된다면, 또다시 9만 원은 남겨두고 81만 원은 대출로 사용될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시중의 돈은 최대 1000만 원으로 증가할 수 있다.
부분지급준비제도는 경제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적인 부분이 있으나, 근본적으로 은행이 보유한 돈보다 많은 돈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과 금융위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은행이 대출을 통해 창출한 신용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뱅크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내재적인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은행은 이미 파산한 것이고 언제나 파산 상태에 있다.
고객이 의심을 가지고 뱅크런이 일어날 때만 파산상태가 드러난다.
머리 로스버드
뱅크런: 신뢰의 붕괴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 은행(SVB)이 파산했다. 48시간 만에 420억 달러(약 55조 원)가 인출되며, 역사상 가장 빠른 뱅크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실리콘밸리 은행은 미국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이 주로 거래하는 은행이었다. 하지만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해 보유한 장기 채권의 가치가 급락했고,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고객들이 일제히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은행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개입하여 예금 보호를 발표했지만, 이미 금융권의 신뢰는 흔들리고 있었다. SVB 사태는 디지털 시대의 뱅크런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같은 해 7월,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새마을금고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몇몇 부실 대출이 문제가 되면서 금융권 불안 심리가 확산되었고, '돈을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장을 지배하며 단 며칠 만에 4조 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정부는 긴급 대출을 지원하는 등 예금자들을 안심시키 위한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미국 실리콘밸리 은행처럼 새마을금고가 파산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새마을금고 사태는 은행 시스템이 신뢰에 기반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모두 보관하지 않고 대출을 통해 돈을 운용하는 부분지급준비제도에서는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려 하면, 아무리 건전한 은행이라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아왔을까?
지급정지
화폐가 대량으로 발행되면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하다. 구매력이 유지되는 자산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은행은 본질적으로 모두 파산 상태에 있다. 모든 예금자가 한꺼번에 돈을 인출하려 한다면, 은행은 지급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금융 시스템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은행은 파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자신들이 발행한 은행권을 금이나 은으로 교환하는 것을 중단하는, 이른바 '지급정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지급정지의 역사는 1812년 전쟁(War of 1812)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규모로 화폐를 발행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화폐 가치 하락이 발생했다. 결국, 1814년 9월, 은행들은 금과 은으로의 태환을 중단하고 지급정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금융 불안이 지속되면서, 지급정지는 1817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급정지는 단기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은행 운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해서 금융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고, 정부는 금융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17년, 제2합중국은행이 설립되었으며, 은행들의 지급준비율을 관리하고 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836년,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제2합중국은행이 해체되자, 미국 금융 시스템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은행들은 각자도생 하며 개별적으로 지급준비율을 설정했고, 금융 시장은 불안정성을 키워갔다.
결국,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Fed)가 설립되면서,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지급정지는 금융 위기를 일시적으로 막을 수는 있었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정부는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맡을 중앙은행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예금보호제도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에서 전례 없는 주가 폭락이 발생했다.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이날, 1,290만 주가 거래되며 금융 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채 5일이 지나지 않아 10월 29일(검은 화요일), 주가는 완전히 붕괴했다. 이는 곧바로 금융권의 대혼란으로 이어졌고, 경제 전반이 붕괴하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서막이었다.
은행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금융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예금자들은 불안을 느끼고 앞다투어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고, 1933년까지 약 9,000개 이상의 은행이 파산했다. 당시 은행 시스템은 개별 은행의 신뢰에 의존했기 때문에, 한 은행이 무너지는 것이 연쇄적으로 금융 시스템 전반에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신뢰를 잃은 은행 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바로 ‘예금보험제도(Deposit Insurance System)’이다. 1933년, 미국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를 설립하여, 일정 금액까지 예금을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예금보호제도의 핵심 목표는 예금자들에게 ‘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어, 불안감에 따른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예금보험제도의 도입 이후, 예금자들은 불안해할 필요 없이 은행에 돈을 맡길 수 있었고, 금융 시스템의 신뢰는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금보호제도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은행들은 ‘어차피 정부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아래,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출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용 창출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과잉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단순히 소비재 물가뿐만 아니라 부동산·주식 같은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자산 인플레이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물가 상승을 넘어, 개인의 경제적 격차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는지. 다음 장에서는 자산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우리 삶의 격차를 만들어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도서 : 정부는 우리 화폐에 무슨 일을 해왔는가, 지은이 : 머리 로스버드, 출판: 커뮤니케이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