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인플레이션에서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부의 대물림: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집값이 너무 높아졌다.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만으로는 내 집 마련을 꿈꿀 수 없는 시대다. 사회초년생들이 주택을 구입하려면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해지면서, 세대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부모 세대 역시 안심할 수 없다. 자녀들의 독립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는 데다, 자산을 가진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 간의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호주 시드니 대학의 사회학자 리사 앳킨스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간의 경제적 갈등이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자산의 불평등한 접근은 이미 글로벌한 현상이며, 이 문제의 중심에는 '자산 인플레이션'이 있다.
부의 축적 방식은 노동에서 자산 보유 여부로 완전히 이동했다. 단순히 일하고 저축하는 방식으로는 자산을 축적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내 집 마련뿐 아니라 경제적 이동성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자산 시장: 정부가 만든 콜로세움
미국 주식은 장기적으로 우상향 한다는 믿음이 투자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2024년 한국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매수 규모는 2,553억 8천만 달러(약 375조 원)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미국 증시가 이렇게 강한 상승 구조를 갖게 된 것은 단순히 경제성장 때문만이 아니라, 정책적·제도적 요인이 맞물린 구조적 결과다.
1978년 미국 내국세법 개정으로 도입된 401(k) 퇴직연금 제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제도는 퇴직연금 자금을 지수형 펀드 등에 꾸준히 투자하도록 유도했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급 기반을 마련해 미국 증시가 하락해도 결국 우상향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구축했다. 또한, 미국인들의 퇴직금을 증시에 투자하게 함으로써 자산이 증가해야 한다는 슬로건에 미국인들을 동참하게 했다.
정부의 자산시장 유도 정책은 주택시장에서도 나타났다. 1980년대 초반 레이건 행정부는 민간 금융기관들이 주택담보대출을 시장에서 유동화할 수 있도록 민간 주택저당증권(MBS) 발행을 허용했다. 이 조치는 민간 자본의 주택시장 참여를 확대시켰다. 이어 1990년대 클린턴 정부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자가 보유 확대를 명분으로 더욱 공격적인 주택 구매 정책을 펼쳤다. 주택담보대출 기준 완화와 정부 보증 주택금융 프로그램 확대 등으로 개인들의 주택시장 진입 문턱을 크게 낮춘 것이다.
위와 같이 21세기가 자산 경제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각종 정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정부가 굳이 경제체제를 자산중심으로 재편할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미국의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상품 시대의 종말과 자산 시대의 개막
1970년대는 화폐가 금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앞서 살펴봤듯 인플레이션은 화폐 가치를 하락시켜 채권자에게는 불리하고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당시 미국은 노동조합의 힘이 강력한 시대였다. 상품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은 즉각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기업들은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상품가격과 임금이 서로 밀어 올리는 '임금 인플레이션(wage inflation)'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세계 경제는 고물가와 경기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늪에 빠졌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9년 연방준비제도(Fed)의 폴 볼커 의장은 두 자릿수의 초고금리 정책을 강행했다. 볼커는 경기침체를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까지 인플레이션의 고리를 끊으려 했고, 그의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상품 인플레이션은 억제되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기업 도산과 실업률 급증이라는 혹독한 경제 침체가 뒤따랐다.
하지만 볼커의 고금리 정책 이후 미국 경제는 다시 성장으로 전환되었고,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은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금리를 지속적으로 낮췄다. 초저금리 기조가 형성되자 금융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낮은 금리로 인해 금융기관들은 대출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주택시장은 가장 강력한 자산시장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상품가격 중심의 인플레이션은 점차 사라졌지만, 대신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자산 인플레이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저축 대신 주택과 같은 실물자산 투자를 선호하게 되었고, 주택 가격은 소득 증가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노동과 임금이 중심이던 경제구조는 막을 내리고, 자산을 소유한 사람만이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값싼 신용이 만든 자산 계급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재임기(1987~2006년)는 금융시장과 경제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시대였다. 이 시기에 연준은 경기침체나 경제위기 조짐이 나타날 때마다 적극적인 금리 인하를 통해 시장에 값싼 신용을 공급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이를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라 불렀다. 그린스펀 풋이란 금융시장이 위기에 처하면 중앙은행이 항상 구제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를 뜻하는 말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도 임금 인상과 복지 확대 등 전통적인 사회적 투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높은 임금과 복지 지출은 다시 임금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이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화폐를 지속적으로 발행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하여 자산 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이 더욱 효율적인 선택으로 여겨졌다. 정부는 지속적인 화폐 발행과 자산 가격 상승을 통해 이른바 '낙수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이렇게 공급된 값싼 신용은 특히 부동산 시장으로 강하게 흘러들었다. 낮은 금리 덕분에 개인들은 큰 부담 없이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주택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과 임금이 아닌 자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길로 눈을 돌렸다. 이전 시대에 경제적 계급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같은 노동의 형태로 구분되었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경제적 계급은 '자산을 소유한 자'와 '자산을 소유하지 못한 자'로 나뉘기 시작했다.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산을 미리 소유한 이들만 경제적 번영의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주택: 금융시장의 성장 동력
주택이 자산 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주택이 사실상 금융시장과 직접 연결된 금융 상품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자산 인플레이션 시대, 주택의 진정한 가치는 거주 기능보다는 금융 담보로서의 기능에 있었다. 이미 주택을 보유한 사람들은 자산 가격이 상승할 때마다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추가 자산을 매입하거나 소비를 늘렸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당시 저금리 환경 속에서 주택담보대출 기준이 완화되자, 많은 가계가 주택담보 신용대출(Home Equity Line of Credit, HELOC)이나 캐시아웃 재융자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소비를 늘렸다.
2000년대 초반 미국 경제의 성장은 명백히 주택 가격 상승과 이를 기반으로 한 소비가 주도했다. 주택 가격 상승에 따른 '부의 효과(Wealth Effect)'가 미국 경제 전반에 걸쳐 소비를 활성화시킨 것이다. 주택을 금융시장 중심에 둔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장려한 결과였다. 정부는 주택 금융 시장에 민간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금융 규제를 완화했고, 주택 시장 참여 문턱을 낮췄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가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과 소비 중심으로 구조적 전환을 이루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은 주택시장 거품을 더욱 크게 키웠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경기 침체기에는 자산 가격이 하락하기 마련이다. 2008년의 주택 가격 붕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자산가들은 위기를 겪은 뒤 오히려 더 큰 부를 누리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자산 경제 시스템 자체가 일부 자산가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까? 이 해답을 찾기 위해, 이제 다음 장에서 신용 경제의 이면과 자산 경제의 진짜 모습을 파헤쳐 보자.
참고도서 :이 모든 것은 자산에서 시작되었다, 지은이 : 리사 앳킨스, 출판: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