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혁명: 중앙화에서 탈중앙화로
건전화폐의 귀한: 돌화폐에서 비트코인까지
건전화폐란 무엇인가? 건전화폐란 지금까지 공급된 화폐량(저량, stock)에 비해 앞으로 일정 기간 새롭게 생산될 화폐량(유량, flow)이 상대적으로 적은 화폐를 말한다. 쉽게 말해, 인위적으로 화폐를 찍어내 가치를 떨어뜨리기 어려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금이 건전화폐로 기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꼭 금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재화든 희소성만 갖춘다면 화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얩(Yap) 섬의 돌화폐가 좋은 사례이다.
얩 섬에서는 과거에 커다란 돌이 화폐로 쓰였다. 주민들은 먼 바다를 건너 어렵게 돌을 구해 왔고, 큰 노력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돌화폐는 희소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 돌들은 섬의 특정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었고, 돌의 소유권은 마을 사람들 사이의 구두 약속으로 기억되었다. 심지어 돌이 바닷속에 빠지거나 섬에서 사라져도, 소유권에 대한 공동체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얩 섬 사례를 언급하며, 화폐의 본질은 실물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에 있음을 강조했다.
비트코인은 총 공급량이 2100만 개로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으며, 신규 공급이 극히 제한적으로 설계되었다. 비트코인이 건전화폐로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비트코인은 실물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데이터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가치를 의심받았다. 하지만 얩 섬의 사례에서 보았듯, 화폐의 본질은 실물이 아니라 신뢰와 희소성이다. 정부가 보증하는 법정화폐와 비트코인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아무도 비트코인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가치를 조작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뢰로 연결되어, 비트코인의 가장 큰 경쟁력이자 가치가 된다.
블록체인: 신뢰에서 검증으로
현대 화폐시스템은 정부와 중앙은행이라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은행에서 돈을 이체할 때, 은행이라는 제3자가 모든 거래를 기록하고 인증하는 방식이다. 거래 참여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에 중앙의 공신력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화된 시스템은 관리자의 실수나 부패, 해킹 등 외부 위협에 취약하다.
비트코인은 이러한 중앙집중적 신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비트코인은 제3자의 신뢰에 의존하지 않고, 네트워크 내 모든 참여자가 거래의 유효성을 직접 검증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방식이 바로 블록체인(Blockchain)이다. 블록체인은 거래 정보를 담은 데이터를 ‘블록’ 단위로 저장하고, 이전 블록과 다음 블록을 연결하여 ‘체인’ 형태로 연결하는 기술이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모든 참여자(노드)는 각자의 장부에 똑같은 거래 기록을 저장하고 관리한다. 따라서 거래를 위조하거나 조작하려면 전 세계 수많은 참여자의 장부를 동시에 바꿔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특성 덕분에 블록체인은 신뢰할 수 있는 제3자가 없이도 신뢰가 보장되는 거래 시스템으로 기능한다.
결국, 비트코인이 제안하는 블록체인은 ‘신뢰(trust)’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투명한 ‘검증(verification)’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중앙 권력의 개입 없이도 모든 거래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기록되고, 누구나 그 정당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과 완전히 구별된다. 이러한 특성이 비트코인의 신뢰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핵심이다.
화폐의 구매력 보존
구매력을 보존하지 못하는 화폐를 사용하는 국가는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상품권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품권은 특정 매장에서만 사용 가능하며, 그 매장이 폐업하거나 발행 업체가 부도를 내면 즉시 가치를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품권을 장기적으로 보유하지 않고 빠르게 소비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법정화폐도 이와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대표적인 현대 사례는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의 사례이다. 2008년 짐바브웨는 연간 수억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베네수엘라 역시 최근 수년간 수천 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하며 자국 화폐의 신뢰를 상실했다. 시민들은 현금을 보유하는 대신 실물 자산이나 외국 통화로 즉시 교환했고, 장기적 저축과 투자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인플레이션이 상황에서의 화폐는 현재의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상품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경제적으로 왜 문제가 될까?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저축을 통한 자본 축적과 그에 따른 생산적 투자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화폐가 장기적인 구매력을 보존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저축보다 즉각적 소비를 선호하게 된다. 즉, 경제학적으로 '시간선호(time preference)'가 높아지며 현재 소비가 미래 소비를 압도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시간선호가 높아지면 소비재 중심의 경제로 흘러가 자본재 생산이 위축되고, 장기적 생산성이 떨어지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 관점에서 필요한 투자 자금이 부족해지고, 결국 자본재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 성장은 둔화된다. 반대로 화폐의 구매력이 안정적으로 보존된다면, 사람들은 미래 소비를 위해 현재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게 된다. 이는 낮은 시간선호를 의미하며, 저축된 자금은 자본 형성에 기여하고 투자를 활성화시킨다. 결국, 화폐의 구매력 보존은 단지 개인의 저축 욕구만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반의 자본 축적과 투자를 촉진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이다.
디플레이션과 낮은 시간선호
전통 경제학에서는 디플레이션이 소비를 위축시키고 기업의 이윤을 줄이며, 결국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고 본다. 오늘보다 내일의 물가가 더 싸다면 소비자들은 오늘 소비할 이유가 줄어들고, 재화의 판매가격은 물론 판매량까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이란 결국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이다. 화폐 가치가 상승하면 오늘 소비하는 것보다 내일 소비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것이 소비자가 소비를 미루고 저축을 선택하는 이유다. 일반적인 경제학 교과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긍정적인 측면도 명확히 존재한다. 소비자들이 즉각적인 소비 대신 저축을 선택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시간선호(time preference)’가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낮은 시간선호란 현재의 소비 충동을 억제하고 미래 소비를 위해 자금을 저축과 투자를 하는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성향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낮은 시간선호 환경에서는 자본 축적과 생산적 투자가 자연스럽게 촉진된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금융기관을 통해 기업들의 장기 투자자본으로 이어진다. 기업은 확보된 자본으로 생산 설비와 기술 개발에 장기적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어 결국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는 장기적인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된다. 더욱이 디플레이션 환경은 기업에게도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고 해도,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생산 원가 또한 낮아진다. 따라서 기업 입장에서는 미래의 판매가격이 낮아지더라도 수익성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개선할 수 있다. 원가 하락을 통해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되면, 시장 전체 규모가 커지면서 판매량이 증가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제 원유 시장이다. 지난 수십 년간 기술 혁신과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원유의 생산 원가는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이는 전반적인 유가 안정화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원유를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기업들은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소비자에게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공급했다. 이는 오히려 석유 제품 수요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다시 말해 디플레이션적 환경에서도 기업의 수익성과 경제 성장이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화폐가 장기적인 구매력을 안정적으로 보존하며 디플레이션적 환경이 유지될 때 사람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를 위한 저축과 투자를 선택하게 될 수 있다. 디플레이션 환경은 기업에게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 원가를 낮출 수 있는 자본 축적의 기회를 제공하며, 소비자에게는 더욱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하는 경제적 선순환을 만든다. 디플레이션과 낮은 시간선호는 단기적인 경기 침체가 아닌, 지속 가능하고 장기적인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비트코인의 화폐 기능과 사토시
비트코인이 화폐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흔히 제기되는 문제는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2100만 개로 한정된 비트코인이 과연 전 세계 경제의 거래 수단으로 충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트코인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트코인은 매우 작은 단위로 세분화될 수 있다. 비트코인 1개는 정확히 1억 개의 작은 단위인 '사토시(Satoshi)'로 구성된다. 금본위제 시절 금이 매우 미세한 단위로 나누어져 표기된 화폐에 표기되어 거래에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비트코인도 충분히 작은 단위로 나뉘어서 사용될 수 있다.
즉, 비트코인의 한정된 공급량은 화폐로서의 기능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트코인이 한정된 총량을 가지면서도 충분히 작은 단위로 세분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물가 안정과 장기적 가치 보존이라는 전통적인 화폐의 역할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비트코인의 이런 세분화 기능은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서로 다른 물가 수준에 맞추어 거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국가 통화는 인플레이션이나 화폐 개혁 같은 사건으로 인해 신뢰성을 잃기 쉬웠지만, 비트코인은 공급량 제한과 세분화 가능성을 통해 오히려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화폐 기능을 갖추었다.
비트코인과 화폐 시스템의 충돌: 경제학파의 다양한 시선
비트코인의 등장과 성장으로 인해 기존의 법정화폐와 비트코인 사이의 충돌이 점차 불가피해지고 있다. 이러한 충돌을 바라보는 경제학계의 시선은 극명하게 나뉜다. 우선 케인즈학파나 통화주의(Monetarism)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경제학파는 비트코인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개입이 없는 화폐 시스템은 경기 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으며 경제적 안정성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화폐 공급량을 유연하게 조절하여 경기를 관리하는 통화 정책의 효용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위적인 통화 공급 확대가 경기 순환을 일으키고 자산 버블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화폐 공급이 자연적으로 제한된 비트코인이야말로 경제적 안정성을 오히려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을 자의적으로 늘리면, 이는 결국 화폐 가치 하락과 부의 재분배를 초래하여 장기적으로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통화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디지털 화폐의 출현과 중앙은행의 영향력 감소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 결정이나 블랙록 같은 글로벌 금융 기관들의 비트코인 투자는 기존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다음장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의 연구를 통해 기존의 화폐 시스템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도록 하자.
미래의 화폐는 어떤 형태를 가지게 될까? 과연 컴퓨터의 바이트(byte)일까?
밀턴 프리드먼
참고도서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가, 지은이 : 사이페딘 아모스, 출판: 터닝포인트